doki|공생관계에 사랑은 불가피하다
2020. 6. 20.fic
*폭력적인 소재와 그러한 묘사가 있습니다.
- 나는 언제 좋아해요?
공생관계에 사랑은 불가피하다
나라고 뭐 다른 줄 아니. 도운이 골목에 뻗어 sos 쳤을 때 원필은 뒤축 구겨 신은 운동화 직직 끌고 나갔다. 원필이 골목을 기웃대며 오고 있을 때 도운은 남의 집 담벼락과 남의 집 뒷마당에 깔린 보도블록, 남이 심은 이름 모를 꽃 같은 것들을 보고 있었다. 원필이 오지 않는다면 내일 아침에 이 집 사는 사람에게 발견되겠지. 자꾸 눈이 감기고 안일한 생각이 드는 걸 보니 아무래도 남의 집 뒷골목에서 기절할 것 같았다. 그래도 원필이 와주면 좋겠어서 새삼스럽게 눈물이 나려던 참이었는데 눈앞에 빨간 아디다스 트레이닝복이 쪼그려 앉았다. 구겨 신은 운동화. 나라고 뭐 다른 줄 아니.
그래도 형이잖아요. 도운이 팔 뻗자 원필이 붙잡고 일으켜 세웠다. 뭐 먹고 들어갈래? 그냥 집에 가요. 하여튼 말라 가지고. 마른 원필이 마른 도운을 부축하며 걸었다. 도운은 원필이 와서 하나도 안 아프다고 했다. 또 웃기지도 않는 소리 한다. 원필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대꾸했다. 운동화가 자꾸 벗겨진다며 도운을 붙잡고 신발을 고쳐 신었다. 구겨 신으니까 그렇죠. 너 죽는 줄 알고 급하게 나와서 그래. 나 걱정했어요? 당연하지. 진짜요? 아니. 원필이 다시 어깨 내밀었을 때 도운은 괜찮다고 했다. 실실 웃으면서 형 너무 말라 가지고, 그런 말을 덧붙였다. 너 죽는다. 원필이 장난스레 배를 때리자 도운이 윽 하고 쓰러지는 척했다. 웃기지 말고 빨리 와. 넵.
원필의 집은 몇 번을 와도 습했고 도운은 그 집에 영 익숙해지지 않았다. 원필이 건네는 옷 받아들고 화장실로 들어가 옷을 들춰보니 멍이 가득했다. 누가 워커를 신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살짝만 스쳐도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상처는 며칠 더 가야 사라질 것이다. 대충 씻고 바지만 겨우 입었다. 괜히 배에 힘주고 화장실 나섰는데 원필은 보고도 혀만 한 번 차고 말았다. 약 주까? 형, 한 번 할까요? 아니. 약 주까? 넵. 기껏해야 후시딘이고 붙일 밴드도 없었지만 원필이 직접 손가락 들어 발라주는 것만으로도 도운은 다 나은 것 같다고, 또 웃기지도 않는 소리를 했다. 원필이 부러 세게 문지르자 이번엔 진짜로 아픈 소리가 났다. 왜 맞고 다녀 그러게. 원필은 제가 더 아픈 듯이 울상 지었다. 만세 시켜놓고 티셔츠까지 입혀주고 나서야 원필은 도운의 손 맞잡고 말했다. 도우나. 이제 맞으면 나 부르지 마. 살려달라고 부르지 말라구.
반쯤 진심이었고 반쯤은 그냥 흘려들으라고 하는 말이기도 했다. 원필은 알고 있었다. 도운이 위험할 때 부를 사람은 저밖에 없다는 것을. 원필은 가끔 상상했다. 도운이 나를 찾지 않고 사라져버린다면. 그냥 눈을 감고 잊어버릴까. 찾을 생각도 하지 말고 누군가 묻는다면 그런 애 몰라요, 해버릴까.
하지만 정말로 그런 날이 온다면 원필은 도운을 찾으러 나갈 것이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골목을 들여다보고 다닐 수도 있었다. 원필은 그렇게 될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차 끊겼으니까 자고 갈래요. 원필은 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고 도운은 알아서 이불을 꺼내 바닥에 깔았다. 원필이 가만히 그 모습을 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에서 자. 형이 바닥에서 잘게.
나 괜찮은데요.
그 꼴을 하고.
같이 침대에서 자는 건 어때요.
도운아.
알았어요.
얌전히 매트리스에 눕자 발치에서 뭔가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이불을 치워보니 고양이가 웅크리고 있었다. 얘 뭐예요. 아 맞다 양이. 고양이라고 이름이 양이에요? 나 그런 거 잘못한단 말이야, 이름 짓는 거.
원필은 알레르기 때문에 눈을 빨갛게 뜨고선 고양이를 맡는 사람이었다. 입양한다는 사람이 나오기 전까지는 기꺼이 한겨울에도 창문을 열고 약을 챙겨 먹었다. 힘들면서 왜 자꾸 맡아요. 도운이 발밑의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얘는 어디로 가요? 아직은 없어. 보통 만지면 물던데. 착해서 그래, 너무 예쁘지.
좋으면 형이 데리고 살아요.
내가 어떻게 키워.
알레르기는 괜찮아지기도 한다던데.
그거 말고. 나는 나 사는 것도 벅차서 안 돼.
원필이 이불을 턱 밑까지 끌어올리고 눈을 감았다. 누굴 책임질 만한 능력이 없어 나는.
도운은 알고 있었다. 원필은 저를 죽게 둘 수 없다. 불쌍히 여기기 때문이다. 사람 이용하는 거 아니랬지만 상도덕 챙기기 전에 사는 게 급했으므로, 도운은 원필에게 붙었다. 도운은 고양이와 달리 보내질 곳이 없다. 그래서 더, 언제까지 원필의 곁에 머무를 수 있을지 몰랐다. 원필이 남은 동정심을 소진할 만큼 여유가 없어진다면.
가만히 침대에 누워 양이와 원필의 숨소리를 구분하다가, 도운은 조용히 움직여 가방에서 편지지를 꺼냈다. 언젠가는 자리를 비켜주기 위해 늘 가지고 다니던 편지지였다. 이렇게 누워있다 보면 생각나는 말들을 조금씩 적어두었다. 핸드폰 불빛에 비춰 문장을 옮겨 적었다. 이제 편지를 완성 시켜야 할 것 같았다.
형 첫인상 어땠는지 쓸까. 도운은 원필과 만난 순간을 선명히 기억한다.
작년까지만 해도 원필은 애인이자 동업자인 형과 사람 패는 일을 했다. 깡패와 엮이기 싫은 사람들이 좀 덜 깡패인 형을 찾았다. 주로 가정사였다. 복싱을 배운 형이 때리고 원필은 따라다니며 수습했다. 형이 사람을 패는 동안 원필은 atm에서 수수료의 십 퍼센트를 뽑고 봉투에 넣은 다음 뻗어있는 사람에게 의미상 전달했다. 효과적인 협박을 위해 의뢰인이 옵션으로 추가한 병원비였다. 원필은 돈을 세고 봉투에 담으면서도 의뢰인들을 싸이코패스라고 생각했다. 저와 형도 다를 건 없었지만 합리화했다. 나는 상도덕 같은 거 따질만한 여유가 없는걸. 대부분은 옵션을 추가했지만 가끔 안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면 그냥, 맞은 놈만 불쌍해지는 거지 뭐.
아내와 잤다는 애를 패달라는 요청이었고 옵션이 없었다. 주소 찍고 승합차를 모는 형 옆에 앉아 혀를 쯧쯧 차며 도착한 곳에는 진짜 애가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저와 또래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입고 있는 검은 티셔츠나 얇은 바람막이 같은 게 훨씬 어린 애 같다는 인상을 주고 있었다. 가끔은 형이 때리는 걸 구경하기도 했지만 그 애가 맞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마음이 안 좋았다. 어리지 않나. 말랐던데. 너무 어려. 옵션도 없는데. 죽는 거 아닌가? 다리 떨면서 문밖에 앉아 기다리는데 평소보다 좀 오래 걸리는 기분에 문을 두들겼다. 형 씨발 문 열라고! 소리 지르면서 막 두들기니까 형이 나왔다. 왜냐고 묻는 걸 밀치고 들어가 구석에 쪼그리고 누운 애한테 곧장 갔다.
야.
야아.
...
씨발 이 싸이코패쓰들.
늘상 메고 다니는 작은 크로스백에서 잡히는 대로 돈을 꺼냈다. 기절한 애 머리 앞에 놓고 가자니 조의금 같아 찝찝해서 손에 쥐여주려는데 갑자기 걔가 눈을 떴다. 뭐 하세요? 악 깜짝아. 너 괜찮니?
도운은 원필의 첫인상을 이렇게 기억한다. 빨간 아디다스 바지. 쓰러진 사람한테서 돈을 뺏는 것도 아니고 쥐여주는 이상한 사람.
처맞는 동안에는 예전에 친누나가 했던 말을 계속 떠올렸다. 도운아 어쨌든 살아야 해. 왜 하필 모르는 사람한테 죽도록 맞는 상황에 그런 말이 떠올랐는지. 물음표만 그리면서 어쨌든 살겠다고 가드 올리다가 알아차렸다. 그 사람이 남편한테 들켰구나. 어쩐지 오늘 십만 원 보내더라. 머리 막고 있던 팔에 힘이 빠지는 대로 턱에 어퍼컷 꽂혔다. 누나, 어쨌든 살겠다고 한 일인데 것 때문에 죽게 생겼어.
도운과 원필의 일은 비슷했지만 달랐다. 따지자면 도운의 부류를 처리하러 다니는 것이 형과 원필이었다. 동물의 세계로 치자면 도운의 천적이 형. 도운이 불법으로 돈을 벌면 불법을 때려잡기 위해 형과 원필이 불법으로 나서는... 그런 식이었다. 구조를 이상하게 깨고 들어와 제 손에 만 원짜리 몇 장 쥐여주려는 원필을 마주했을 때, 도운은 원필의 손을 붙잡았다.
나 패라고 시킨 사람도 패줘요?
미친.
도운이 생기고 원필은 형과 헤어졌다. 도운은 원래 있어야 했던 사람처럼, 처음부터 원필과 알고 지내던 사이였던 것처럼 생겨났다. 원필은 종종 형이 헤어지며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니. 당시의 원필은 형을 죽여버리고 싶을 만큼 그 말이 싫었다. 형을 사랑하는 것은 나쁜 짓을 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덜 수 있는 유일한 변명거리였다. 원필은 빌어서 용서를 받을 수 있다면 사랑을 믿었다. 그러니까 형의 ‘이렇게’ 가 무엇인지도 듣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났지만, 그건 누가 들어도 원필이 도운 때문에 형을 떠날 줄을 알았다는 말이었다.
너 때문에 배신자가 됐어. 원필은 도운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도운은 좋네요, 그랬다. 뭐가 좋아? 나는 사랑 없인 못 사는데. 원필이 소주잔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우는 동안 도운은 조용히 제 컵에 소주를 채웠다. 나는 안 되는 거예요?
뭐가.
나랑은 하면 안 돼요?
뭐를.
사랑이요.
나랑 너랑?
안되나.
어우 야.
좀 부담스럽나?
좀 그래.
그러면 좋아하는 건요.
웅?
좋아해요 형.
어?
난 언제 좋아해요.
원필이 멈추자 도운이 손에 얼굴을 묻었다. 아아아아아 형 그냥 못 들은걸로 할래요? 아니다 그건 좀 싫은데. 그냥 대답하지 마요. 근데 아예 안 하진 마요. 그래도 그냥. 아 나 모르겠다. 혼자 몸부림 아닌 몸부림을 치더니 새빨개진 얼굴로 횡설수설하는 게 꼭 첫사랑한테 고백이라도 한 열여덟짜리 남자애 같아서, 원필은 그냥 웃었다. 소리 내서 웃고 배를 잡고 웃고 도운의 볼을 잡아당기며 웃었다. 이 반응은 뭐예요. 도운이 입 내밀며 묻자 원필이 답했다. 도운아, 너는 너무 귀엽다 나랑 다르게. 그래서요? 그래서, 내가 널 책임을 못 질 것 같아.
내가 개도 아니고, 고양이도 아니고 무슨 책임을 져요. 도운이 애꿎은 종이컵만 씹으며 웃었다. 나는 완전 별론데 너는... 귀엽잖아. 형도 귀여워요. 난 아니야. 형 진짜로 귀여워요. 나는 너랑 느낌이 다르다니까. 형 진짜로 보면 막 심장이 뛰고 안아주고 싶고 나 그냥 지금 하는 짓 때려치고 형이랑만 하고 싶을 정도로 귀여워요.
...도운아.
예.
너 나를 진짜 좋아하는구나.
그렇다니까요.
내가 안 좋아해도?
봐서요.
웃긴다 너.
장난이고 당연하죠. 원래도 형은 나 안 좋아하는 거 알고 좋아한 거거든요.
원필은 어떻게 확신하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방법을 알게 되면 저도 같은 식으로 도운을 사랑하게 될까 무서워 묻지 않았다. 하지만 도운에게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도운의 마음이었지만 도운도 몰랐다. 다만 빨간 아디다스가 쓰러져있는 내 눈에 들어올 때마다 살 것 같아요, 말할 수 있었다. 그건 백 퍼센트의 마음이었다.
반면 원필은 ‘이렇게 될 줄 알았다’ 는 형의 말이 계속해서 떠올랐기 때문에 도운을 사랑할 수 없었다. 형은 원필의 연락을 받지 않았고 혼자서도 여전히 그 일을 했다. 어느 날 도운이 한참 말을 돌려가며 그 형이 죽었다던데요 전했을 때 원필은 웅크린 채 말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너를 안 살려줬을 텐데. 도운은 그 말에 다시는 안 돌아올 것처럼 문을 세게 닫고 나갔지만 다음 날 그렇게 나가서 미안하다며 돌아왔다.
그 뒤로는 다시 똑같았다. 도운이 형 살려줘요 부르면 원필이 나갔다. 이제 나를 그만 부르고 그만 좋아하라고 말할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신발 뒤축 구겨 신고 튀어 나갔다.
원필이 잠에서 깼을 때 양이는 제 손등을 핥고 있었고 도운은 없었다. 이불까지 예쁘게 개어놓고.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생각하며 빈 밥그릇을 채우고 물그릇에도 물을 채웠다. 말도 없이 사라진 적은 없었다. 연락이 온 것도 아니었다. 무슨 일 있나? 원필은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고 내친김에 화장실을 청소하고, 소매를 걷어 올린 김에 청소까지 마쳤다. 간만에 아르바이트 쉬는 날이라 같이 밥이라도 먹으려고 했는데. 그리고 도운이가 그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몇 번이나 핸드폰을 들어 혹시나 문자가 왔는지 확인했지만 여전히 조용했다. 사라졌나.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다리에 힘이 풀렸다. 도운이가 왜?
내가 나 먹고살기도 바쁘다고 해서?
더 예전에 고백했을 때 안 받아줘서?
언제 좋아하냐고 물어봤는데 대답을 안 해줘서?
그때 거기서 뭐라고 대답했어야 되는 건데?
관자놀이를 꾹꾹 짚으며 도운이 개어놓은 이불을 옷장에 넣으려는데 두 번 접은 편지지가 발치로 떨어졌다. 그제서야 실감이 났다. 도운이는 이제 살려달라고 연락을 하지도, 따라서 이 집에 오지도 않을 것이다. 꼭꼭 막아뒀던 마음들이 쏟아졌다. 억지로 밀어 넣고 잠가버린 문을 다시 열자 외면했던 모습들이 자꾸 떠올랐다. 도운이는 문을 열고 나갔다.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원필은 이 집에서 그게 제일 불행한 점이라고 생각했다.
*
나 글씨 못 쓰는 거 알지만 일단 씁니다. 못 알아보면 안 되는데.
형. 이렇게 편지라도 쓰다 보면 이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을까요?
형은 누구를 책임질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했지만 형은 처음 만난 순간부터 매일매일 나를 구해주고 있었어요. 그래서 좋아하지 말래도 뻐겼어요.
처음에는 살고 싶어서 형 붙잡은 건데, 이제는 정말로 형이 살려주러 와야지만 살 것 같아요. 그래도 이제 형 그만 부를게요. 형이 싫어져서 그런 건 아니고요. 내가 이제 정신 차리고 잘 살려고 그러는 것도 아니라요, 그냥 언제부턴가 형을 보면 계속 울고 있는 것 같아요. 옆에서 눈 감고 자고 있는 지금도. 요즘 더 그러는 것도 아니고 원래 그랬는데 내가 좀 이기적이라서 이제 자리 비켜주는 거예요.
형 외로워요? 아직도 형이 세상에서 제일 나쁜 것 같아서 힘들어요? 그래도 나 한 명 살렸으니까 스스로 용서 좀 해주고 살아요. 내가 보기엔 형이 제일 천사 같고 귀여워요. 난 아마 죽을 때까지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형도 알다시피 나는 형밖에 없으니까...
형 내 마음엔 시간이라는 상식 자체가 없는 것 같아요. 이렇게 쓸 수 있는 거 보면 나 진짜 형을 너무 좋아하나 봐요. 형은 언제 다 커서 나 좋아한다 말해줄래요. 나보다 동생 같아. 원필아ㅋㅋ 나중에 혼나겠네... 근데 진짜 나 언제 좋아해요. 언제쯤 나 살려 줄 거예요. 언제쯤 나 걍 죽게 내버려 두실래요.
그나저나 내가 진짜 형 때문에 이런 짓도 해보네. 깜찍하죠. 이만 줄일게요. 나중에 봐요.
*
이제 살려달라고 원필을 찾는 일은 없었다. 원필은 아르바이트를 계속했고 가끔 도운을 생각했다. 새벽에 양이를 안고 병원으로 달려간 일도 있었다. 정신없이 뛰어나갔다가 짝이 맞지 않는 운동화를 신고 다시 집으로 돌아올 때 서러워져 울기도 했다. 그리고 양이를 입양하겠다는 사람이 나타나서 두 시간 동안 지하철을 타고 간 적도 있었다. 전부 확인한 후에 다시 지하철을 타고 양이를 넘겨줬다. 원필은 다시는 고양이를 맡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계속 집에 뒀던 장난감과 남는 사료와 화장실 모래 같은 것들을 같이 넘겼다. 닫힐 새 없이 열어뒀던 창문을 다시 닫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외로운지 생각했다. 외롭냐고 물었던 도운을. 생각하다 보면 다시 겁 없이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어느 날, 모르는 번호로 살려달라는 전화가 왔을 때. 원필은 다시 뛰쳐나갔다. 현관문을 열고 계단을 두 칸씩 뛰어 내려갔다. 도운아 네가 정말로 죽을까 봐 걱정했어. 한 번도 그런 걱정을 안 한 적이 없었어. 끊지 마.
원필이 1층에 도착했을 때 본 것은 멀쩡히 서 있는 도운이었다. 멀쩡한 도운이 말했다. 용케도 안 넘어지고 내려왔네요. 무릎을 꿇고 원필이 뒤축 구겨 신은 신발을 다시 신겨줬다. 무릎을 털고 일어나자마자 원필이 도운의 목을 끌어안았다.
양이 다른 집으로 갔어.
잘됐네요.
뭐가 잘돼. 나는 외로워서 죽을 뻔했는데.
나 형 살려주러 왔어요.
응.
나 잘 왔죠.
응.
이제 어디 가지 말까요?
도운아.
예.
차 끊겼으니까 너 여기서 살아.
이제 사랑 말고 다른 마음은 없었다. 원필은 어쩔 수 없음을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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