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크리스마스는 내 첫사랑에게 선물을 주는 소중한 날이었다.
2020. 6. 20.fic
- 우리의 사랑은 도대체 왜 이래
크리스마스는 내 첫사랑에게 선물을 주는 소중한 날이었다.
1999년 12월 25일. 달력에 큰 동그라미를 치다 못해 별도 다섯 개나 그렸다.
내일은 나 김원필이 첫 출근하는 역사적인 날임과 동시에 크리스마스였다.
부산? 꽤나 가까운 곳으로 배정이 되었다. 나는 선물을 전달해 주는 산타였다.
산타가 기본적으로 지녀야 할 덕목 첫 번째 외모. 거울 앞에서 한 시간은 진작 보냈다.
너무 오바하는 거 아닌가. 아냐 그래도 신경 써야지, 어뜨케 나 오늘 좀 잘생긴 것 같아 훙훙.
콧노래를 부르며 빗질을 시작했다. 후에 동기가 그랬는데 미친놈인 줄 알았다고 했다.
딸랑-
뭐야? 종 소리 구려. 12시 정각 10분 전을 알리는 종이 울림과 동시에 산타 무리들이 썰매를 타고 각자 갈 곳으로 떠났다. 나도 서둘러 썰매를 끌고 루돌이에게 인사했다.(루돌프인데 방금 정했다.) 하늘을 거르며 명단을 확인하였다. 와 얘 이름 예쁘다. 윤도운, 1995년 8월 24일, 하품하다 눈물 난 적 빼고 운 적 없음. 실실거리다 결국 꺽꺽대며 웃었다. 순한 애도 있구나.
내가 지금 문을 따면 오해를 받을까 생각 끝에 담을 넘기로 했다. 이 정도면 식은 죽 먹기지. 발 헛디뎌서 넘어졌다. 김원필 너 산타 맞냐? ...헐.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급하게 창문 열어 아이에게 다가갔다. 우와 산타다. 안녕? ...너 도운이 맞지? 도운아 오늘 형 본 거 비밀로 할까? 선물 두 개 줄게. 최대한 슬픈 표정을 지었다. 예 알겠어요. 아 먹혔다! 너 되게 착하구 귀엽다. 대신, 어? 저랑 놀아주시면 안 돼요? 심심해요. 그래... 동이 틀 때까지 놀았다, 해 뜨는 거 멍하니 바라보다 망했음을 직감했다. 아 마을로 다시 돌아가야 되는데. 도운아? 일어나봐. 형 이제 가야 돼. 내년에 또 만나? 나 잊지 마. 할 말만 하고 곧장 마을로 다시 돌아갔다.
아 맞다 이거 선물들 다 어떡해? 대장에게 불려가 신입이 첫 출근부터 일을 개판으로 했다고 까였다.
윤도운은 날 잊지 않았고 그렇게 17살이 될 때까지 매년 만났다. 부산이라곤 윤도운 집밖에 몰랐기 때문에 만날 때마다 친구 얘기나 세상 얘기를 해 줬다. 하는 애기들은 하나같이 웃기고 귀여웠는데 마치 윤도운 같았다. 샴푸했는데 다른 생각하다 또 삼푸한 것, 친구 이름 까먹어서 기억해내느라 쩔쩔맸던 것, 자취한 거 까먹고 배송지 잘못 적은 것 등, 전엔 내 얘기도 해 줬는데 윤도운도 산타라곤 나밖에 모르기 때문에 알아듣질 못했다. 그래서 잠자코 듣고 있다가 리액션만 30분 했다.(도운이가 꼴에 낯간지럽다고 윤도운이라고 부르랬다.)
윤도운이 그랬었다. 형 저만 보러 오면 안 잘려요? 왜? 도운이는 나 잘리면 좋겠어? 으에? 아이 그건 아닌데요... 형 매일 보고 싶어서요. 사실 윤도운만 만나느라 잘리기 일보직전이었다. 근데 보고 싶은 걸 어쩌라고 일 년에 한 번밖에 못 만나는데. 나중에 대장에게 불려가 한 소리 들었다. 사람을 그렇게 믿지 말고 너무 정 주지 마라. 아 진짜. 정 주지 말라니 정준하야 뭐야. 한 귀로 흘러들었다.
그날따라 유난히 재수가 없었다. 그릇도 깨고, 만년필 줍다가 머리도 박았으며 새로 장만한 하얀 옷엔 빨간 양념이 떨어졌다. 고데기도 망해서 머리를 다시 감아야 했다.
2012년 12월 24일 11시 40분이었다. 오늘은 도운이가 무슨 얘기를 해 줄까?
힘껏 윤도운을 불렀다. 윤도운! 어? 이상했다. 얘가 내 말을 무시할리가 없는데?
윤도운, 도운아? ...뭐야? 윤도운이 나를 무시한다. 뭐야 왜 쌩까. 한순간에 사람이 싫어질 수가 있나? 아니 난 산타긴 하지만 어쨌든. 뭔가 이상함을 느끼던 찰나 내 머릿속에 산타 마을 헌법과 대장 말이 무섭게 스쳐갔다.
산타 헌법 제1조 1항 인간이 산타의 존재를 의심하게 되면 산타를 인지하지 못한다.
인간을 너무 믿지 말고, 너무 정 주지 마라.
헌법 처음 봤을 때 뭐 저런 법이 있나 싶었고 솔직히 나와 거리가 먼 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으로서는 그 법은 크나큰 문제였다. 설마. 나는 혹시나 해서 윤도운 앞에서 원맨쇼를 했다. 소리도 지르고, 눈앞에서 손도 흔들었다. 괘씸해서 머리도 쥐어뜯었다. (잡히지 않았다.) 역시나 윤도운은 나를 무시했다. 아니 보지 못했다. 이런 상황 선배나 동료들에게 듣기만 들었지 겪은 적은 처음이라 눈물밖에 나오지 않았다. 아니 윤도운 넌 다를 줄 알았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대장 걔 예지 능력도 있었나? 초능력자야? 헌법 누가 썼어? 내용이 왜 그따위인데.
2012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12시가 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윤도운이 울었다. 눈물이 수도꼭지를 튼 듯 쏟아진다.
숨도 못 쉬고 눈물을 쏟아내더니 곧이어 뱉듯이 말한다.
원필이 형. 왜 안 와요? 지금 열두 시 지났어요. 형 혹시 내 친구가 하는 말 들었어요? 들은 거 맞죠? 저번에 친구한테 형 얘기를 했었어요. 형도 알죠? 승휘. 승휘가 언제적 산타를 믿냐며 아직까지 믿으면서 어린 티 내는 내가 순진하고 바보 같댔어요. 내가 이상하댔어요. 그래서 잠시 형 의심했다가 그럴 리 없다며 크리스마스 날만 간절히 기다렸어요. 근데 왜 안 와요. 내가 미워서 안 오는 거예요? 원망해요? 내 얘기 들어주시면 안 돼요? 나 형 좋아한단 말이에요. 보고 싶어요. 형 어디에 있어요? 형...
눈물을 닦아주고 싶어서 볼에 손을 가져다댔다. 눈물이 닦이지 않는다. 여러번 다시 시도해 봤지만 눈물은 닦이지 않았다. 닦아주고 싶은데. ... 아니 잠시만 윤도운 쟤 나 좋아해? 이대로 두면 정말 안 되겠다 싶어 당장 산타 마을로 돌아갔다. 대장을 찾아야 한다.
사랑 앞에서 꼰대 구세주 되는 거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난 무작정 무릎부터 꿇고 빌었다.
대장님 저 뭐든 할테니까요. 일도 다시 제대로 할테니까요. 도운이한테 제가 다시 보이게 해 주시면 안 될까요, 네? 법 좀 어떻게 안 될까요? 법은 언제든지 바꿀 수 있는 거잖아요. 제발. 저 지금 너무 간절하단 말이에요...
대장이 한참을 고민하다 법은 법이야. 너의 존재를 의심하면 다시 볼 수 없어 미안하다. 대장 저더 진짜 시간이나 끌지 말지. 이럴 시간이 없었다. 빨리 윤도운에게 가야 했다.
돌아가는 길에 문득 루돌이에게 미안했다. 13년 동안 이렇게 움직인 적이 없었을 텐데... 이럴 줄 알았으면 이름도 거지같이 지어주지 말걸. 맥시무스 뭐 이런 걸로 지어줄걸.
실없는 생각 끝에 다시 윤도운의 집으로 왔다.
이렇게 된 거 나도 내 마음 정도는 말하고 가도 되겠지? 떨리는 손을 부여잡으며 울고 있는 윤도운 앞에서 내 마음을 전했다.
윤도운 도우나 이렇게 보니 많이 컸네? 도운아 12년 동안 재미있었다, 그치? 산타랑 놀아주느라 수고했어. 하지만 난 너랑 노는 순간들이 참 소중했구 또... 나도 너 좋아해. 어떡하지 나는 너 볼 수 있는데 너 이제 나 못 봐. 대신 내가 네 옆에서 항상 지켜보고 있을게. 글구 나 너 원망 안 해. 또 내가 없는 크리스마스도 잘 지내야 돼. 넌 좋지? 말 많은 산타도 없어서. 사랑이 왜 이래?
답이 없을 질문을 던졌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사실 원망을 안 한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도운이 말고 도운이 친구. 김승휘? 넌 내 눈에 띄면 아주 죽어 진짜.
시간이 흘러 도운이는 날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 꽤나 바쁜 일상을 살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입학하고, 취업을 했고, 결혼도 하고, 아들까지 낳았다. 또 그 아이는 자라서 5살이 되었다. 그걸 모두 지켜보았다. 도운이의 모든 순간 속에 내가 있었다.
2027년 12월 24일 11시 50분.
서울로 가는 길에 나는 명단을 확인했다. 어? 명단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윤도영, 2023년 4월 14일, 크게 넘어져서 울었음.
윤도영은 도운이의 아들이었다.
생각해 보니 도운이 처음 봤을 때도 5살이었는데... 윤도운 생각하다가 나도 모르게 발을 헛디뎌 담 타다 넘어졌다. 아악! 이러다 허리 나가는 거 아닌가 몰라. 왜 이래 이거. 윤도운 괜히 담 높은 거 세워둔 거 아니야 나 넘어지라고?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자 ...어? 도운이 아들이랑 눈이 마주쳤다. 얘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적은 없었는데. 28년 전 도운이와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윤도운 아들과 마주쳤다. 이럴 수가 있나? 나는 떨리는 손으로 창문을 열어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똑같은 말을 했다. 안녕? ...너 도영이 맞지? 도영아 오늘 형 본 거 비밀로 할까?
크리스마스는 내 첫사랑에게 선물을 주는 소중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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