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우린 도대체 왜 이래

2020. 6. 20.fic

시골 강아지 같은 외양의 초등학교 6학년 윤도운은 이따금 누나가 다니는 피아노 학원으로 출석 도장을 찍었다. 누나와 함께 집에 간다거나 하는 기특한 이유까진 아니고, 그저 누나의 옆 방에서 레슨을 받는 한 살 위의 형을 보기 위함이었다. 도운의 누나보다 늦게 태어났을 게 분명하고, 더 늦게 피아노를 시작했을 터인데. 형의 피아노 선율은 어쩐지 누나의 것보다 몇 년은 앞선 것만 같았다.

 

원필아, 정말 괜찮겠니?”

괜찮아요. 그렇게 큰 대회도 아니에요.”

그래도 걱정되는데.”

집에서도 연습하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감사합니다, 원장님. 조곤조곤 자기 할 말을 다 하는 김원필, 원필이 형. 손이 그리 크지도 않은 것 같은데. 대보면 자신의 손보다 훨씬 작을 것만 같은 손으로 피아노 위 건반들을 종횡무진 횡단한다. 도운은 그런 원필의 모습을 레슨실에 난 작은 창 너머로 몰래 보곤 했다. 물론 눈치 빠른 원필은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어쩐지 강아지 닮은 남자애의 시선은 전혀 기분 나쁘지 않은 종류의 것이라서, 원필은 그런 도운의 깜찍한 행동을 눈감아주기로 했다. 그리 느긋한 성정도 아니었던지라 원필은 도운에게 일주일하고도 하루가 지난날에 계속된 둘만의 숨바꼭질에 끝을 고했다.

 

너 왜 맨날 나 훔쳐봐?”

? , 저는, 그게.”

너 앞으로 밖에서 그렇게 보지 말고,”

 

내 옆에 앉아서 봐도 돼. ? 별안간 벌컥 열리는 레슨실 문에 모양 빠지게 놀라 넘어질 뻔한 도운은 이어지는 원필의 말에 눈을 크게 흡 뜰 수밖에 없었다. 그게 초등학교 6학년 윤도운과 중학교 1학년 김원필, 둘의 첫 만남이었다. 너 놀라는 거 진짜 웃기다. 완전 사고 치다 놀란 백구 같아. 웃지 않고 피아노를 칠 때는 마냥 차갑고 무서운 형인 줄로만 알았는데. 고개를 뒤로 꺾어가며 웃는 원필의 웃음이 마냥 밝아 보여서 도운은 귀 끝을 붉혔다. 야 도우나 너 귀에서 피 난다.

 

 

 

 

 

원필은 도운이 사는 아파트의 옆 옆 아파트에 살았다. 도운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하던 날, 원필은 친한 이웃 남자아이를 위해 조회 시간에 급하게 같은 반 친구의 손을 빌려 만든 종이꽃을 건네주며 도운의 입학을 축하해주었다. 본인도 부끄러운 건지 조금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내 다시 웃음을 참지 못하고 훙훙 소리를 내버렸지만.

 

야 윤도운! 입학 축하해.”

 

도운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고마워요 형, 했다. 이날도 역시 도운은 자신의 불타는 귀 끄트머리를 숨길 수 없었다. 원필은 그런 새빨간 도운을 보며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고작 한 살 차이인데도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는 것도. 새하얀 피부도.

 

학교에서도 원필은 자주 도운의 반으로 내려왔다. 도운의 친구들은 저 형 너 괴롭히러 내려오는 거냐고, 찍힌 거 아니냐는 억측을 늘어놓기만 했다. 그럴 때마다 도운은 그런 거 아니라는 말만 하고 곧장 뒷문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원필을 따라 나갔다. 가끔 체육복이나 색연필 같은 준비물을 빌리러 오기도 했지만, 원필은 뭔가 용무가 있을 때만 도운을 불러내진 않았다. 그냥. 같이 앉아서 얘기하고 싶으니까.

 

너는 나 안 귀찮아?”

아니요 전혀.”

뭐야, 진지하게 대답하는 거 진짜 웃겨.”

맨날 불러도 돼요. 하나도 안 귀찮아요.”

그래라 그럼.”

 

둘은 먼지가 쌓인 음악실의 피아노 앞에 나란히 앉아 시간을 보내곤 했다. 음악 선생님은 음악실 문 잠그는 것을 자주 깜빡하곤 하셨다. 하릴없는 동아리 활동 시간이나 방과 후 시간에 땡땡이치기 안성맞춤의 공간이었다.

 

노을이 지는 바깥으로부터 스며들어오는 주황빛 햇볕. 공기 중에 둥둥 떠다니는 조그마한 먼지들. 그리고 김원필. 원필이 형. 요새 연습 중인 곡이 있다며 음악실 문을 꼭 잠그고 짧동한 피아노 의자 위에 나란히 앉아있는 시간을 도운은 소중히 했다. 처음으로 피아노 레슨실 안에 들어갔을 때처럼. 형의 연주를 듣다 고개를 슬쩍, 들어 오로지 건반에만 집중하는 원필의 옆태를 보던 것처럼.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원필은 한껏 입꼬리를 위로, 또 눈꼬리는 아래로 당겨 환하게 웃어주었다. 소리 좋지? 하고 묻는 원필의 물음에 도운은 입으로는 좋아요, 하고 대답했다. 마음속으로는 저는 형이 좋아요, 조용히 대답했다.

 

도운은 사랑이 뭔진 몰랐지만, 원필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영부영 넘길만한 사춘기 남자아이의 짝사랑이라기엔 도운의 마음은 너무간지러웠다. 포근하고 따뜻하고 온종일 얼굴을 맞대고 있다가도 뒤돌아서 각자의 집으로 향할 때면, 시도 때도 없이 생각이 났다. 정말 여느 아이돌의 노래 가사처럼 원필을 생각하면 재채기가 나올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차가운 새벽 공기에 코를 훌쩍거리고 있으면,

 

뭐야 너 감기 걸렸어?”

 

원필은 자연스럽게 가방 앞주머니에서 꺼낸 스카프를 도운의 목에 걸어주었다. 손수건 같기도 한 그것에서 원필의 향이 나는 것만 같았다. 우리 백구 도우니이이 아프면 안돼용. 양 볼을 진짜 강아지처럼 어루만져주며 웃는 원필에 도운의 심장은 오늘도 거세게 뛰었다. 버스 창가 자리에 앉아 함께 노래를 듣자며 줄 이어폰을 꺼내어 너는 오른쪽, 나는 왼쪽 하며 귀에 끼우기라도 하는 날이면 도운은 열심히 붉어진 귀를 숨기려 애썼다. 오늘 왜 이렇게 덥지, 하며 부러 손부채질하기도 했다. 어색한 도운의 몸짓에 원필은 그저 훙훙 기분 좋아지는 웃음소리와 함께 도운의 귀를 함께 가라앉혀주려 들었다. 원필이 슬쩍, 만져본 오른쪽 귀는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다.

 

 

 

 

 

도운은 중학교 2학년에서 3학년으로 넘어갈 무렵 드럼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해 학교 축제에서 참조로 왔던 옆 고등학교의 밴드부가 인상 깊었다고 원필이 말했기 때문이었다. 도운의 눈에 들어온 건 드럼이었다. 드럼을 잘 치는 밴드부 형. 몇 살 차이 나지도 않는데, 그가 그렇게 멋있어 보였다. 막 팔을 흔들고 스틱을 든 양손으로 북들을 강하게 내려치고. , 딱히 하교 중에 원필이 드럼 멋있다고 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정말로. 드럼을 배운다는 사실을 원필에게는 따로 말하지 않았다. 왜냐고 물으면 글쎄, 그냥 부끄러웠다고 할 수 있겠다.

 

먼저 고등학교에 가게 된 원필은 한 달에 한 번씩 선짓국을 먹으러 가는 습관이 생겼다. 원필이 도운에게 직접 말해준 건 아니었지만, 원필의 시간표에 맞춰 그를 쫓아다니며 알게 된 사실이었다. 선짓국 집에 마주 보고 앉아 원필은 선짓국, 도운은 국밥을 먹었다. 입 짧은 둘이 교복을 입고, 학생에게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 허름한 가게 안에서 밥을 먹는 모습이 다소 이질적이었다.

 

후룩, 국물 떠먹는 소리가 둘 사이 식탁 위를 채웠다. 도운은 한 번도 선짓국을 먹어 본 적이 없었다. 국 속에 푼 양념 탓인지 빨갛게 변한 국 사이로 보이는 갈색의 선지. 도운은 비위가 아주 살짝, 약했다. 그래서 원필과 달에 한 번씩 선짓국 집으로 올 때면 장난으로라도 한 입만 먹어 볼 수 있냐고 묻지 않았다. 원필도 굳이 도운에게 권하지 않았다. 그저 언제나 아무런 말 없이 자신을 따라와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먼 가게에 와 함께 끼니를 챙기는 도운이 고마웠다. 자신이 고등학생이 된 이후 얼굴을 보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져서 그런 건지, 몇 달 새 도운은 전보다 성숙해진 것 같았다. 또래의 철없는 남자아이들처럼 괜히 무게를 잡거나 가오를 부리는 게 아니라, 정말 필요할 때만 자신의 소신 발언을 한다든지. 곧 도운도 고등학교에 갈 텐데. 아직 어느 고등학교로 갈 건지 묻지도 못했다.

 

아주 문득, 원필은 궁금해졌다. 이렇게 착하고 순한데 원필은 도운의 여자친구를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물어보기로 했다, 도운이한테! 도운은 요새 무슨 학원이라도 다니는지 이따금 종이 뭉치들을 가방에서 꺼냈다 넣기를 반복했다. 밀린 수행평가를 내일까지 해야 한다며 정신없는 모습이었다. 마침 하교 후 단둘이 온 곳도 아파트 단지 앞 상가의 사람 없는 카페겠다, 원필은 직구를 던지기로 했다. 나 김원필, 궁금증도 이겨냅니다.

 

도운아. 윤도우운.”

네 형.”

넌 여자친구 안 사귀어?”

 

그리고 정지. ? 못 들었어? 여자친구 있냐구. 도운은 당황하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썼다. 언젠가는 대답해야 할 질문이라 생각하고 분명 대답을 생각해뒀었는데 그게 어디 있더라, 비상 비상. 윤도운의 머릿속 용량이 빠른 속도를 견디지 못하고 펑.

 

제가 무슨 여자친구예요,”

 

잘했다 제군! 도운은 삐용삐용 뇌 속 사이렌을 울린 것 치곤 최대한 덤덤하게 만들어낸 목소리로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전 형이랑 다니는 게 더 좋아요. , 이 말은 붙이지 말 걸 그랬나. 슬쩍 수행평가지 위로 쳐다본 원필은,

 

.”

 

같은 테이블에 앉아 가까이 얼굴을 맞대고 있지 않았다면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도운은 잠시 신께 감사했다. 자신의 말에 붉어진 얼굴로 아랫입술을 앙 다문 원필의 모습을 보게 된 건 도운의 짧은 인생 중 몇 안 되는 행운이니까. 물론 가장 큰 행운은 형과 만난 것이었지만. 원필은 후끈거리는 얼굴을 숨기지 못하고 연신 양손을 자신의 볼에 갖다 댄 채로 열을 식히려 들었다. , 쟤는 어떻게 저런 말을 스스럼없이. 이상한 건, 그 말을 들은 원필의 기분이 전혀 나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도운은 그런 원필을 가만히 보다가 툭 내뱉었다.

 

저는 형 좋아해요.”

 

이게 아닌데. 이렇게 무드 없이 막, 말하려던 게 아닌데. 도운은 마음속으로 망했다만 연신 외쳤다. 이게 뭐냐 윤도운!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도운은 다소 흔들리던 자신의 동공을 가까스로 붙잡고 원필의 눈을 마주 보았다. 이미 브레이크가 고장 나버린 입은 아무 말이나 내뱉기 시작했다. 저 형 진짜로 좋아해요, 장난하는 거 아니고요. 도운은 테이블 밑 자신의 두 손을 꽉 쥐며 놀란 원필을 바라보았다.

 

한편 원필은 토끼 눈을 뜬 채로 어버버, 도운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쟤가, 쟤가 지금 뭐라는 거야. 하지만 이상한 건, 원필도 그런 도운이 싫지 않았다는 거다. 오히려 좋았으면 좋았지, 거절할 이유는 단 하나도 없었다. 원필은 인터넷 소설의 한 대사를 날리며 도운에게 묻고 싶었다. 나 너 좋아하냐. 물론 진짜 입 밖으로 꺼내진 못했다. 올곧게 자신을 바라보는 도운의 눈빛은 누가 봐도 진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두근, 두근. 입 밖으로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아. 첫 만남 때부터 피가 나는 것처럼 새빨개진 도운의 귀가 보였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도운아, 나 사실 뱀파이어야.”

 

아니 아니. 이게 아닌데. 이건 정말 아닌데. 도운은 입을 살짝 벌린 채로 원필을 바라보았다.

 

.”

 

정적만이 감돌았다.

myosk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