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이런 나라도 꽉 안아줘
2020. 6. 20.fic
J.
...
대답 좀.
나 바빠.
집에서 노트북이나 두드리고 마는 게 다면서 뭐가 그렇게 바쁘다고. 야. 뭐. 그만 까불어라, 진짜. 싫어, 쪼잔한 새끼. J가 그 말에 한숨을 푹 내쉬곤 안경을 벗어 내려놓았다. 화면을 몇 시간 내리 보고 있었더니 무슨 라이트 차단 안경을 썼어도 눈알이 뻐근하다. 저 쫑알거리는 것만 없었어도 진작에 모든 걸 끝내고 저새끼가 누워있는 제 침대에 발 뻗고 누워서 게임이나 할 텐데. 넌 니 뒤에 있는 게 K만 아니었어도 진작에 뒤졌어, 알아? J가 그 말을 하며 필을 향해 총을 겨눴다. 헐... 말 진짜 서운하게 하네. 겁먹은 눈치는 커녕 총을 들었건 말건 1도 신경 쓰지 않는 필이 괜히 침대 매트리스에 발을 쿵쿵 굴러댔다. 내가 어쩌다가 저런 망나니랑 일을 하게 되어서는. 본인도 만만치 않은 성격의 소유자이긴 하다만 쟤는 진짜... He is such a headache for me. 미국에서 제이, 그 알파벳 한 글자만 들어도 사람들이 벌벌 떨었다던 J, the troubleshooter 의 명성이 한없이 낮아지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어 눈앞이 아찔해졌다.
할 말 뭔데.
헐. 들어주게?
셋 센다. 3, 2...
J야, 나.....
...
나 아무래도 사랑에 빠진 것 같아.
...
...
What the... 나가.
에어컨을 최대 냉방으로 틀어놓곤 이불에 둘둘 둘러싸여 있는 주제에 사랑 같은 소리나 하며 볼이 발그레 해진 꼴을 차마 두 눈으로 똑바로 볼 수가 없어서, J가 벌떡 일어나 필의 이불을(사실 본인의 이불이다) 빼앗아 억지로 일으켜 등을 떠밀었다. 아, 아 형 갑자기 왜 그러는데!! 이럴 때만 형이지? 꺼져.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런 거 얘기하려면 니 좋은 머리로 내가 못 알아듣게 빙빙 돌려서 얘기해. OK?
차가운 방 안에 있다가 반대로 열기로 가득 찬 복도로 내쳐지니 몸이 부르르 떨렸다. 저 지랄맞은 새끼. (다 들리거든??) 들리라고 한 거거든! (Oh, shit...) 유일한 대화 상대인 J마저 귀찮다고 쫓아내버리니 필은 처음 생긴 이 고민에 대한 조언을 도대체 누구에게 물어야 하나 생각했다. 그니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만난 그 멍청한 얼굴이 자꾸만 생각이 났다. 따지고 보면 아주아주 잘생긴 얼굴이긴 했는데, 지어 보이는 표정이 좀 멍청했다고나 해야 할까? 물론 그때 상황이 좀 급박하고, 필 본인이 위협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래, 일반인이라면 좀 무서웠을 수도 있지. J의 작업실 문 앞에 기대어 앉은 필이 무릎을 당겨 그 위로 얼굴을 얹고 핸드폰 화면을 켰다. 온갖 한 글자 알파벳으로만 이루어진 간결한 전화번호부 사이에 눈에 띄는 윤도운, 세 글자가 오늘따라 더 유별나게 보였다. 그니까, 자꾸만 나도 모르게 널 떠올리게 됐다는 거 아니겠어?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뭐야...
이런 나라도, 꽉!!! 안아줘!
도필합작 '우리 사랑은 도대체 왜이래'
그러니까, 첫 만남은 K의 의뢰인이 정보를 잘못 흘리는 바람에 타겟 쪽에게 그대로 들통이 날 뻔했던 날이었다. 필에겐 잘 돌아가는 머리가 있었지만 거지 같은 체력과 약한 몸뚱이 또한 있었다. 보통 이즈음이면 K가 S나 누구나 한 명쯤 더 보내서 필을 돕게 하도록 했을 텐데, 문제는 하필 오늘 아침 K가 사업 때문에 캐나다에 출국한 날이었다는 게, 아주 기가 막히는 우연의 시작이었다. 거기다 뛰다가 떨어트려 박살이 난 핸드폰 액정도 한몫했다. 왓더퍽... J가 매번 중얼거리는 욕을 필도 입에 담았다. 20분을 내리 뛰었을까, 낮인데도 좀 어두운 골목이 있어 그쪽으로 황급히 뛰었다. 사람 하나 대상으로 차 네대가 동시에 달려오는 게 어디있냐구요. 이런 불공평한 세상 같으니라고. 잔뜩 짜증이 나서 높은 벽 너머로 입고 있던 검은색 맨투맨과 검은색 모자를 벗어 던졌다. 어지간히 잘 먹고 사는 집인가 보네. 어두운 골목과는 다르게 높은 담벼락 안에 광택이 나고 커다란 집이 으리으리하게도 놓여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대문이 철컥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저 으리으리한 집에서 웬 남자가 저벅저벅 걸어 나왔다. 필이 집어던진 맨투맨을 머리에 쓴 남자가. 바로 모른 척 뒤를 돌아 남자의 반대쪽인 골목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저음의 목소리가 저기요 하고 필을 불러세우려 했다. 그거에 돌아서면 멍청이지.
그쪽으로 가면 벽 밖에 없어요.
하는 말에 필이 도로 몸을 돌려 남자를 바라봤다. 하하. 멍청이는 나였네. 난데없이 웃음을 터트리는 필에 남자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웠다. 죄송해요, 처음 와보는 동네라. 아. 그럼 이만. 이 옷, 그 쪽 거죠. 아닌데요. 맞는 것 같은데. 아니라니까. 지금 여기 그쪽밖에 없잖아요. 나오시기 전에 이미 떠났나보죠. 아닌데. 맞는데. ... ... 웃고 있는 필의 입꼬리가 슬슬 한계점에 도달하고 있었다. 후우... 이봐요. 한숨을 푹 내쉬곤 이를 꽉 물고 넌지시 말을 꺼내는데, 남자의 등 뒤, 골목의 앞쪽 도로에 검은색 자동차가 지나가다 멈추는 게 보였다. 오마이갓... 왓더퍽킹크레이지떨거지들 같으니라고..
옷 던져서 미안하고요, 제꺼 맞으니까 잠시 실례 한 번만 더 할게요. 이럴 때는 그냥 수긍하고 빨리 구슬려야 했다. 괜히 이런 거로 시선을 끌 수는 없었으니까. 무엇보다 지금 골목 바깥쪽으로 나갈 수는 없었다. 얼굴이 드러나진 않아 들킬 가능성은 높지 않았지만 그 적은 가능성 마저 눈앞에 두고 고려해야 하는 게 필이 해야 할 일이었다. 마른세수를 두어번 한 필이 다급하게 여전히 멍청이처럼 멀뚱멀뚱 서 있는 남자 쪽으로 빠르게 걸어가 두 팔을 붙잡았다. 제 허리에 그 두 팔을 감고 남자를 확 끌어당겨 가까이 오게 한 후, 필 본인이 더럽게 높은 남자의 집 담벼락에 등을 기대고 섰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남자의 머리에 덮여있던 검정색 맨투맨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필은 본인보다 조금 더 높이 있는 남자의 목덜미를 두 팔로 끌어안고 딱딱한 어깨뼈에 얼굴을 묻었다. 왜, 왜 이러세요. 한 마디도 안 지고 무덤덤해 보이던 남자의 귓가가 한순간에 불타오르듯 벌게졌다. 되게 솔직한 사람이네. 저를 밀어내려는 팔을 꽉 잡아 도로 제 허리에 두르게 한 필이 묻었던 고개를 들어 귓가에 입술을 가져갔다.
그거 알아? 여기 목선을 따라서 쭈욱 내려가다 보면 대동맥이 있어. 내가 여길 찌르는 순간 넌 그대로 골로 가는 거야.
필이 위협할 때나 쓰는(보여주는. 으로 정정한다 제대로 써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잭나이프를 꺼내 들었다. 제 아무리 거지 같은 몸뚱이를 달고 있다고 해도 아무 것도 모르는 일반인보다는 나았다. 그니까 어디를 어떻게 무엇으로 공격하면 사람이 저세상에 가는지, 에 대한 지식이 꽤나 빠삭하다는 거였다. K가 필에게 가르친 거라곤 똑똑한 머리를 어떻게 제대로 굴리는가와 삶을 어떻게 쉽게 끝내버릴 수 있는가에 대한 것들이었으니. 말 그대로 체력이 약하다 뿐이지 어떻게든 살아남을 구색은 갖추고 있다는 말이다. 물론... 이론뿐이긴 했지만(그래도!!!).
제 허리를 끌어안은 팔이 조금 떨리는 게 뻔히 느껴졌다. 더 꽉 안아줘. 더요..? 응. 너 뒤쪽에서 내 얼굴 안 보이게. 필의 말에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하얗고 순진한 얼굴이 제 앞으로 조금 더 다가왔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는 게 좀 웃겼다. 덩치는 저보다 커다래선 대동맥 한 대면 뒤진다는 말에 이렇게나 겁을 먹다니. 아까는 그렇게 말대꾸 하더니. 가까이서 본 남자는 어려 보이긴 하다만 또 막 미성년자처럼 보이는 건 아니었다. 스무살? 스물한살정도? 필과 눈이 마주치는 게 민망한 건지 아님 무섭기라도 한 건지 새카만 눈동자가 한 곳에 있질 못하고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맹한 얼굴의 하얀 뺨에는 점이 콕 박혀있고 여전히 귀는 새빨갛고. 근데 또 제 허리를 감싸 안은 팔에는 핏줄이 여럿 서 있었고 손은 솥뚜껑만 했다. 어쨌거나 순진한 건지 착한 건지 뭔지 모를 남자의 목이나 끌어안고 이런 잡생각이나 하고 있는데, 넓다 싶은 어깨 너머 골목 쪽으로 아까보다 더 많은 검정색 자동차들이 따닥따닥 붙어서 들어오기 시작했다. 헙. 필이 제 입술을 깨물었다. 조금이라도 일이 틀어지면 그대로 끝이다, 잡히는 순간 모든 게. K도 자리를 비운 마당에 지금 사고를 쳤다간... 벌써부터 뒤처리 생각에 골이 당겼다. 검은 차에서 검은 정장을 떼로 맞춘 남자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름이 뭐야.
네?
이름.
도운이요, 윤도운.
도운아, 잘 들어.
...
...
...
...아니다, 걍 가만히 나 끌어안고나 있어. 내가 알아서 할게.
아무래도 멍한 얼굴은 믿을게 못 되었다. 한 치 앞도 제대로 내다보지 못하는 상황에 하나라도 아귀가 잘못 맞물리면 큰일이었다. 괜히 애꿎은 평범한 부잣집 도련님 데려다가 이러는 것도 좀 양심에 찔리기도 하구. 평범하게 잘 살다가 갑자기 지네 집으로 옷 벗어던진 남자랑 이러고 있는데, 그게 그 누구라도 이런 상황은 당황스러울 테니까. 필은 본인의 넓은 아량(...)에 스스로가 감탄하며 제 허리를 끌어안은 채 멍하니 있는 도운에게 대충 지금 상황을 재빠르게 설명했다. 있잖아, 내가 지금 상황이 아주 안 좋거든. 너네 집 앞에 주르륵 줄 서 있는 차들이 다 나를 잡으러 온 거라는 말이지. ..네?? 야야, 뒤돌아보지 말구. 티 나잖아!! 아, 네네. 도운이 고개를 돌리자 저쪽에서 의심을 샀는지 이쪽으로 몇 명이 오는 게 보였다. 필은 괜히 주머니 위로 나이프를 어루만졌다. 시발... K가 이렇게 보고 싶었던 적은 처음이네. K요? 있어, 그런 놈이. 암튼 내가 뭘하건 놀라지 말고 그냥 이 모든 게 끝나면 넌 집에 들어가서 있다가 자기 전에 별일이 다 있었던 하루였구나, 생각하고 싹 잊으면 돼. 오케이? 아아... 네. 물론 나랑 있었던 일에 대해서 입이라도 뻥끗하면 진짜로 쥐도 새도 모르게 대동맥 맞고 뒤지는 수가 있어.
남자가 다정하게 웃으며 뱉는 그 살벌한 말에 도운은 입술을 꾹 물고 착하게 고개만 끄덕끄덕해 보였다. 갑자기 벌어진 이 영문모를 일들에 등이 땀으로 잔뜩 젖었다. 마당에서 방울토마토에 물이나 주다가 위에서 날아온 옷들에 궁금해서 집 밖엘 나와봤을 뿐인데, 어느새 남자의 마른 허리를 부여잡고 있는 것도, 그리고 제 목덜미에 감긴 그 남자의 뜨거운 팔이 도운을 당겨오는 것도. 갑작스러운 이 돌발상황에 겁먹지 않았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고, 그러니까 조금은 무섭기도 하고 아직까진 도대체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또 막 그다지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남자가 무작정 저를 공격하지는 않을 것 같았고(말은 저렇게 했지만...), 일단은 남자도 곤란한 상황에 처한 것 같아서. 근데 문제는, 지금 이런 상황에 자꾸 얼굴에 열이 오른다는 거였다. 그래, 그니까 위급한 상황이라는 건 알겠는데 솔직히 이 남자는 지독하게 도운의 취향이었다. 그래서 얼굴 보자마자 급해서 대뜸 예의 없이 말대꾸나 따박따박 했던건데, 또 한 순간에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끌어안고 있는 게 좀 너무... 아니다 싶었다. 이렇게 빨리빨리 뭘 해치우려던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라리 제집에라도 들어가 숨겨주겠다 말하려(이게 더 이상한가?)한 도운이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아요, 하고 말하려는 찰나, 구둣발 소리들이 말발굽 소리마냥 커다랗게 둘뿐인 빈 골목을 울렸다. 그리고, 도운을 째리던(도운의 입장에선 그렇게 보였다) 필의 눈빛이 바뀌었다. 꼭 뜨거운 사랑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애절하고 말로는 표현하지 못할 그런 물기 가득한 눈으로. 그리곤 도운에게 말했다.
키스해줘,
하고.
그 후엔 정말로 홀리듯 입을 맞추었다. 그냥 가만히 있으라던 말이 빈말은 아니었는지 먼저 입술을 부딪혀 온건 남자였다. 그 직후에 더 파고든 건 도운이 맞았지만. 좀 너무 아니다 싶다던 생각은 이미 저 멀리 하늘로 고이 접어 올려보낸 지 오래였다. 얇고 말랑한 입술이 닿아오자 도운은 자연스럽게 허리에 감겨있던 손을 들어 남자의 뺨을 부드럽게 잡았다. 나머지 한쪽 팔은 얄따란 허리를 지금보다 더욱더 끌어당겼다. 저보다 작은 몸이 가볍게 딸려왔다.
음, 도운, 흐응... 도운이 숨이 모자란 지 헥헥대는 남자를 위해 징하게 엉겨 붙어있던 입술을 잠깐 떼어냈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축 처진 눈매 속 동그랗고 커다란 눈동자는 제 까만 눈동자와는 달리 어둑한 골목에서도 갈색빛이 돌았다. 이름이 뭐에요. 알아서 뭐하게. 궁금해서요. 둘 다 숨이 모자라서 문장을 연결하기 이전에 단어와 단어 사이를 숨소리가 차지했다. 필, 필이라구 불러. 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도운이 다시 입술을 붙여왔다. 도운이 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을 들어 동그란 뒤통수를 더 당겨왔다. 저 옷은 필 옷이 확실하네요. 도운이 중얼거리며 젖은 필의 입술에 여러 번 입술을 맞췄다. 필 몸에서 나는 냄새가 그대로 배어 있잖아요. 도운의 입술이 입가에서 옆 뺨으로, 뺨에서 목선으로 내려왔다.
너어...
네?
너 뭐야, 진짜?
툭 튀어나온 목젖을 핥고 깨물기 시작하는 도운에 필이 다급하게 양 뺨을 잡아 올려 얼굴을 보게 했다. 뭐야 얘, 완전 선수 아냐? 당황한 필이 표정을 숨기지도 못했는데 눈이 마주치자 도운이 또 다시 입술로 달려들었다. 부잣집 찌질이로만 봐서 걍 하는 척이나 해야 하나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키스를 잘했다. 그것도 존나. 필은 도운의 입안으로 먹히는 숨과 소리 들을 굳이 참아내지 않았다. 너...니가 무슨 개새끼야? 개새끼라뇨. 말이 심하시네. 왜 이렇게 깨물어. 코 끝이 마주 닿는 거리에서 서로의 눈을 오랫동안 들여다봤다. 아까는 눈도 못 마주치더니. 대동맥 어쩌고 하면서 죽일 듯 굴었잖아요. 사실 한 번도 사람 안 때려봤어(때리진 않고 총만...쏴봤다). 그게 정상이에요. 응, 그치. 도운이 웃으며 또 다시 필의 아랫입술을 물었다. 검정색 차들은 이미 떠난 지 오래였다. 그런데도 도운과 필은... 끝까지 입술을 떼지 않았다.
망했다, 나...
필이 마음속으로 조용히 속삭였다.
필의 말이 끝나자 J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J가 흘끔대는 시선 안에 제 목에 남은 붉은 자욱들이 걸리는 걸, 필도 눈치챘다. Disgusting. 와, 사람한테 역겹다니, 진짜 재수 없어. 응, 니가 더.
그래서, 잤냐?
자기는 무슨.
...
그냥 키스만 하다가 끝났어.
...그게 끝?
응. 뭐가 더 필요해?
그 키스를 한 두시간은 내리 했던 것 같긴 한데. 걍... 자라. J가 흥미를 잃은 표정으로 다시 안경을 쓰고 키보드를 두어번 두드려 노트북 화면을 밝혔다. 뭔 platonic love도 아니고. 그깟 키스 한 번 한 거 가지고 지금 걔를 사랑하는 것 같다는 거야? 그깟 키스라니? 그럼 그깟 키스가 아님 뭔데? 그래도 그깟은 좀 심했다. 참나... 도운이는 내 전화 잘 받아주거든? 시큰둥하게 필을 등지고 앉아 다시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던 J가 심각한 표정으로 황급히 뒤를 돌아 필을 쳐다봤다. 이 미친 놈아, 걔한테 번호 알려줬어? 아니, 저기요. 나 그렇게 안 멍청하거든? 내가 담보로 걔 번호 가져온 거지. 그래그래, 니 머리 잘 돌아간다. 그 잘난 platonic love에 미쳐서 잘 돌아가는 머리 이상하게 쓸까 봐 그랬지. 암튼 나 도운이 사랑해. 그러던가 말던가. 그래서 줴이... 부탁할게 좀 있어. 눈으로 욕하던 필의 표정이 금세 바뀌었다. 촉촉한 눈동자가 꼭 장화 신은 고양이 마냥 반짝반짝 빛났다. 얼굴 치워라. 나한텐 안 통하는 거 알잖아.
그리고 안 돼.
듣지도 않고?
필, 너 자꾸 착각하는 거 같은데.
...
난 K의 돈을 받고 일하는 거고,
...
넌 K가 주인이잖아.
근데?
까먹지 말라고.
J의 잔인한 확인사살에 필이 덩달아 표정을 바싹 굳혔다. 알아, 나도. 잘못돼봤자 너만 피봐. 필이 시무룩하게 J의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그냥... 부탁이라고 해봤자 K 귀에만 안 들어가게 도와달라고 하려고 했던건데. 그게 그렇게 막 확인사살까지 해야 할 건가. 그 정도로 어려운 건가. 난 왜... 괜히 울적해지는 바람에 또 도운이 보고 싶었다.
K가 돌아왔다. 역시나 늘 그랬듯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필을 찾았다. 형, 왔어. 큰일 날뻔했다며. 응, 근데 잘 넘겼어. 잘했네. 큰 손이 필의 머리를 엉망으로 헝클였다. 오랫동안 봐 왔음에도 K의 앞에선 늘 긴장을 했다. 진행되어가고 있는 사업에 이어서 한참 지난번 의뢰인의 타겟 얘기를 하다 말고 K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제 앞에 놓인 붉은 빛의 차가 담긴 찻잔안에 비친 제 모습만 뚫어져라 바라보던 필이 그제야 말을 멈춘 K를 바라봤다. 필아. 응. 원필아. ... 요즘 무슨 생각해? 오랜만에 듣는 이름에 필이 눈을 여러 번 깜박였다. 옆으로 긴 날카로운 눈을 바라보기가 힘들어서 시선을 다시 찻잔으로 옮겼다. 별다른 생각이랄게 있나? 그냥 형도 없고 허해서...
허해?
...그니까,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렇구나.
...
똑똑하잖아, 필아 너.
...
잘할 거라 믿어.
...응.
K가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으로 파란 멍이 아직 가시지 않은 필의 뺨을 살살 어루만지다 앉아있던 의자에서 일어났다. 피곤하다. 응, 갈게 쉬어 형. 그래. K도, 필도, 그 어떤 말도 제대로 꺼내지 않았지만 왜인지 모르게 필은 꼭 모든 치부를 다 들켜버린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다시금 J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넌 K가 주인이잖아. 도운이 입을 맞추었던 목 부근을 괜히 벅벅 긁었다. 일부러 목 위로 올라오는 옷 입었는데.
어느 날은 낮 3시, 또 어떤 날은 새벽 1시, 그다음 날은 저녁 8시 등등. 필은 제가 꼴리는 아무 시간에 발신번호표시제한으로 도운에게 매일매일 전화를 걸었다. 도운은 제가 암말 하지 않고 숨만 내쉬어도 그게 저인지 알아챘다. 필, 오늘은 뭐 했어요. 일이 끝나고 잘못 맞아 멍이 시퍼렇게 든 뺨을 계란으로 둥글게 문지르다 반쯤 잠에 빠진 목소리에 푸스스 웃었다. 목소리 완전 땅굴 파고 들어가네. 지금 새벽이잖아요. 그건 글치. 도운은 구태여 제가 무슨 일을 하는지 묻지 않았다. 그저 오늘 넘어져서 무릎 깨졌어 하면 다음 날 통화를 할 때 무슨 연고를 바르래요, 하고 나지막이 속삭였고 멍이 새파래 도운아 하면 다음 날 얼음 찜질이 좋대요, 하고 말했다.
필, 옷이랑 모자 돌려주고 싶어서요. 어느 날 도운이 그랬다. 빨아 놓은 지 꽤 됐는데. 이젠 전화로 말고 진짜로 만나고 싶다는 말을 그렇게 돌려서 했다. 필은 도운이 보고 싶어 죽겠으면서 굳이 빙빙 돌려 말하는 도운이 귀여워서 괜히 시간 없다며 꿍시렁댔다. 근데 아, 그래요? 하고 금방 포기해버리는 윤도운(진짜 바보인가?) 때문에 튕기는걸 포기했다. 밤 8시에 갈게 그때 그 골목으로. 응, 알겠어요.
보자마자 꽉 안아 입술을 부딪혔다. 둘 사이에 어떤 빈틈도 허락되지 않은 양, 그렇게 서로의 등을 끌어안았다. 올 때까지만 해도 혹시나 K가 제 뒤를 좇지 않을까, J가 갑자기 수틀려서 다 불어버리는 건 아닌가 하고 오만가지 걱정을 하던 필은 도운의 팔이 제 온 등을 감싸앉자 기억상실증이라도 걸린 듯 모든 것을 잊었다. 진짜로, 매일매일 이렇게 꽉 안아준다면… 무슨 일이 생기던 다 괜찮을 것만 같았다. 줄곧 했던 생각들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이 품에 안기면 다…
도운아.
네.
매일매일 이렇게 꽉 안아줘.
응, 그럴게요.
그거면 됐어.
필.
원필이야.
어떤 이름이던
…
그냥 꽉 안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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