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일과 이분의 일
2020. 6. 20.fic
윤도운은 꽤 오래전, 그러니까 뾱뾱 소리 나는 운동화 신고 걸을 때부터 김원필을 따라다녔다. ‘원피리 횽님’으로 시작된 윤도운의 김원필은, 미취학 아동을 졸업하게 되면서 ‘피리 형아’로 바뀌어 갔다. 그러니 인생의 첫 기억이 김원필일 만도 했다. 거꾸로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치였다. 꼬꼬마 윤도운의 머리는 아주 작았던 데다가, 놀이터 경계에 핀 철쭉 한 송이 보고 헤벌쭉 웃는 피리 형아를 기억하기에도 부족한 용량이었으니. 도오나, 이 꽃 예쁘지이. 웅, 형아 같다…. 발칙하고 용감한 발언이었다.
미취학 아동 김원필은 불도저 저리가라 식 윤도운의 표현을 상당히 좋아했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자주 웃었다. 그네에서 삐거덕 거리는 소리가 나도 꺄르르. 도운이가 횽님 하고 부르면 또 한 번 꺄르르. 김원필의 6년 인생은 윤도운과 꺄르르의 연속이었다. 19세의 김원필이 생각해보니 뭐가 그리 행복했는지 기억도 잘 안 난다. 사고회로는 오로지 꺄르르, 윤도운의 씨익, 그리고. 꽃가루 알레르기처럼 날아들어온.
김원필은 윤도운보다 유치원을 일 년 일찍 떠났다. 유치원 졸업식에서 울었다. 윤도운은 김원필이 가는 초등학교 이름도 모르고 엉엉 울었다. 이미 도운의 어머니와 원필의 어머니는 같은 초등학교에 갈 것을 합의한 뒤였다. 그래서 일 년 뒤에 자기 유치원 졸업식이 끝나고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날, 눈 처음 맞는 강아지 마냥 굴었다. 형아가 왜 나랑 같이 가지. 나 데려다 주려구? 당연히 윤도운 살짝 설렜다. 봄이라는 계절에 걸맞게 얼굴도 살짝 붉어졌다. 9세 김원필은 손을 꼭 잡고 교문을 지났다.
일 학년 삼 반 교실에 데려다놓더니 원필은 도운에게 이렇게 말했다. 잘 있어, 나 갈게. 괜히 잘 있으라는 말이 정 없고 싫어 도운은 도리도리를 시전한다.
하지만 선배는 선배였다. 일 년의 차이를 어찌하랴. 이 학년 사 반 김원필은 떠나야만 했다. 사실, 도운을 생각한다면 그때 떠났어야만 했다. 근데 윤도운이 김원필 손을 또 잡았다. 점심 먹을 때, 나 보러 와야 대…. 그리고 나름 성숙했던 이 학년 김원필은, 웃으면서 바이바이 하고 제 교실로 떠났다. 야속하게도.
둘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때까지도 자주 붙어 놀았다. 실상은 놀았다기보다는 그냥 네모난 스폰지인 양 바람만 불어도 기쁘다며 웃어대는 게 전부였다. 근데 꼭 행복해보이면 둘에게 맨날 딴지를 거는 누군가가 있었다. 이를테면 김원필 앞번호였던 김원재라던가. 십일 년 인생에 지쳐 꼭 시비를 걸고 싶기 마련인 거다. 그냥, 배 아프니까.
너네 둘이 무슨 사귀기라도 하냐. 그리곤 꼭 더럽다는 말을 덧붙인다. 시대 흐름에 전혀 맞지 않는 골 때리는 말들을 늘어놓았어도 둘은 아랑곳 않고 웃더니 김원필 더한 말까지 한다.
도오니 내 건뎅?
눈 하나 깜박 안 하고 윤도운의 소유권을 주장한다.
물론 윤도운이 제 남친이라는 말은 안 했다. 사귄다는 말이나 남친이라는 말이나 그게 그거지만 아무튼 자기 거라고만 했지 관계 정리는 안 했다. 그래도 윤도운은 열심히 저 혼자 뺨을 익혀댔다. 형아 손만 꼭 잡고서. 이 형아가 영원하기를 바랐다. 이 형아가 주욱 제 형아이기를 바랐다.
도운은 원필과 다른 중학교에 갔다. 교복도 다르고, 타는 버스도 달랐고, 같은 건 등교 시간 뿐이었어서. 그래서 죽어라 엘리베이터 앞에서 죽을 때렸다.
그렇게 해서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쳤다. 그리고 한 살 형답게 사춘기도 한 살 먼저. 아주 지대로 질풍노도였다. 중학교 삼 학년이 되자 우리의 원피리 형아는 여자친구를 사귀었다. 그래도 나름 소중하게 생각하는 동생이라서, 제일 먼저 소개해줬다.
도오나 인사해
누군데?
내 여자친구!
십오 세 윤도운의 심장을 덜컥 가라앉게 하는 네 글자였다. 말도 하기 싫은 여네글자. 과장하자면 김원필은 윤도운의 세상이었다. 약 십 년 전, 도운이 내 건데 하는 말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던 도운이었다. 그런데, 변할 것 같지 않던 형아는 이미 지리는 사랑을 하고 있었던 거다. 보는 동생 눈물나게.
메신저 프로필은 이미 둘이 손 잡고 찍은 사진으로 바뀐 지 오래였고(여섯 시간밖에 안 지났다) 프로필에 띄워놓은 디데이 방학 아니고 +1로 바뀌었다. 상태 메시지는 시뻘건 하트로 바뀌었고 같이 게임하자고 연락하면 데이트 중 띄워놓고 윤도운 연락은 씹기 일쑤였다. 도운의 가슴팍에 실컷 불을 질러댔다.
염장 아니고, 방화. 좋아서 방방 뛰겠는 거 아니고, 억장이 무너져서. 그리고 한편으로는 또 행복해 보여서 눈물이 났다.
그리고 원필은 그 친구와 이 주 만에 결별했다. 우리는...안 맞는 것 같아. 사유는 성격이 맞지 않아서. 퍽 어른스러운 이유였다. 원필은 집에 와서 엉엉 울었다. 엉엉 우는 소리가 옆집 사는 도운이네 집에서도 다 들릴 만큼 떠나가라 울었다. 이름을 연신 불러대면서….
두 눈 꾹 감고 무시하려고 했는데 목소리가 자꾸만 들려오니까 그게 잘 안 됐다. 아무리 어릴 적 가벼운 말이었더라도. 첫사랑의 충격량은 꽤 컸다. 윤도운의 첫사랑은 현재 진행 중이었다.
“형?”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 우는 소리가 귀에 콕콕 박혔다. 우는 건 저 형인데 꼭 제 가슴이 저릿했다. 같이 우는 것도 아닌데 숨이 찼다. 본인도 고통스러웠다. 사랑의 검증이었다.
형. 도운은 다시 한번 이름을 불러본다. 우느라 미처 못 들었을 수도 있으니까. 몇 번이고 원필이기에 가능한 기회를 준다. 사랑 앞에서 사람은 한없이 너그럽다. 그것은 아무리 어려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윤도운이든, 김원필이든 간에.
다섯 번쯤 형을 불렀을 때 대문이 작게 열렸다. 근데 현관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미 문을 열어 놓은 장본인은 방에 틀어박힌 뒤였으니.
도운은 말없이 원필을 토닥였다. 그 자리 제가 꿰 찰 수 있으면 좋겠다고 힘든 원필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런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왜 저는 당연히 배제되어야만 하는지. 제일 묻고 싶은 것이었다.
그래도 꾹 참고 위로해줬다. 일단은 제 앞에서 눈물 뚝뚝 흘리는 형이 안쓰러웠으니까. 입이 썼는데 그래도 애써 웃었다. 떡볶이 시켜 먹자고. 떡볶이 먹자고 달랬다.
눈물 반 떡볶이 반이라 짠맛이 강했다. 떡 하나 입안에 넣을 때마다 눈물은 두 방울씩 볼을 타고 흘렀다. 도운은 떡볶이를 시키고선 곧바로 집앞 편의점으로 내려가 딸기 우유를 샀다.
이거 좋아하지 이거 없이 떡볶이 못 먹잖아. 그치
좋아하는 사람이 울고 있으면 입맛도 뚝 떨어진다는 게 이런 건가 하고 스스로 생각해본다. 울음을 그치기 전까지는 국물 한 숟갈 입에 대지 못할 것만 같았다. 재주라도 넘을 수 있으면 넘어주겠다는 생각을 한다. 손에 쥔 딸기 우유가 또 야속하다. 무거운 분위기를 깨보려고 텔레비전을 틀었는데 그 안에서 왠지 익숙한 멜로디의 옛날 노래가 흘러나왔다.
둘이 되어버린 날 잊은 것 같은 너의 모습에 하나일 때 보다 난 외롭고 허전해 네가 가져간 나의 반쪽 때문인가 그래서 넌 둘이 될 수 있었던 거야
떡볶이와 지나치게 상황과 잘 맞는 노래 가사, 전 애인 때문에 울고 있는 짝사랑 상대. 장맛비를 맞으며 집에 가는 것보다도 비참하기 그지없는 요소들의 집합소였다. 그리고 비참해지면, 사람은 눈에 뵈는 게 없어진다. 비참한 제 모습에 가슴 속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열심히 마음을 분출해낼 뿐이었다.
원필이 형
응
남자도 사귈 수 있어?
대답은 안 했다. 사실 김원필은 유치원 때의 기억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유년기의 당돌함을 원필이 잊었을 리 없었다. 제가 도운에게 했던 말들도 전부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모른 척 했다. 소위 말하는 자신의 흑역사로 치부해버렸다. 이유인 즉슨 별거 없었다. 그냥 지금은 안 좋아한다고 생각해서. 도운이 혼자 상상할 만한 그런 심각한 이유는 아니었다. 작고 가벼운 것일수록 사람은 더 잘 지키게 되는 습성이 있다. 도운과 사귀는 상상을 해 봤지만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쟤랑 어떻게 연애를 해. 한 마디로 하자면, 둘은 너무 친했다. 어릴 적에 너무 사랑했다.
하지만 사랑은 해본 놈끼리가 더 무서운 법이다. 아무리 어렸어도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김원필이 좋아하는 게 뭔지 윤도운은 다 꿰고 있었다. 걸어다니는 김원필 백과사전. 감수 윤도운. 밥 안 먹는 김원필 입에 딸기우유 물려가며 함께 자란 게 거의 평생이다. 평생이라면 사랑이 아니라고 착각할 수도 있었다. 한껏 부정해볼 수도 있었고, 확 고백해버리고 절연했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도운은 김원필도 잃기 싫고 제 첫사랑도 잃기 싫었다. 꾸욱 참는 건 선천적으로 가진 재능이었다. 재능이라고 말하면 답답하다는 소리를 들을 만한 재능.
원필은 고등학교 삼 학년이 될 때까지도 몇 번 더 애인을 사귀었고 그 중에는 남자도 있었다. 삼 년 전의 물음에 답을 하지 않은 대신 이렇게 증명해준 거였다. 도운은 이후로 원필을 더 아무렇지 않게 대했다. 원필과 함께 전 애인을 마주치기 전까지는.
그놈은 연애하는 거만 보고 있을 때도 싫었다. 쎄한 감은 틀린 것 하나 없다더니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좋아 죽는 얼굴을 하는 원필을 보면 윤도운 자동으로 아랫입술에 이빨 갖다댔다. 이 깍 깨물고 헤어질 때까지 버텼다. 헤어지길 바란 건 그놈이 처음이었다. 매일 매일 눈 뜨고 잠에 들 때 헤어지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헤어졌다. 헤어졌는데.
헤어지고 나서가 더 개같을 줄은 몰랐던 거다. 몰랐기 때문에 이제는 괜찮을 줄 알았다.
사단은 원필이 삼 학년 일 학기 첫 시험을 끝내고 나서 일어났다. 조용히 다시 공부나 하러 들어가겠다는 걸 도운이 달래려고 밥이나 먹고 집에 같이 가자고 끌고 나온 것이 화근이었다. 매장에 들어서자마자 익숙하고 좆같은 얼굴이 보이는 건 신기루였으면 했는데 아무래도 여긴 대한민국인지라 그렇지는 못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났는데 더 화가 날 사람은 김원필이었으므로 윤도운은 또 한 번 입술을 깨물었다.
말은 상대 쪽에서 먼저 걸어왔다. 첫 남자친구는 나였던 건가, 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게 엊그제 같았는데 어느샌가 원필은 남자친구를 사귀었었다. 그리고 윤도운 제외(윤도운 자칭) 첫 남자친구가 바로 쓰레기 중의 쓰레기였던 것이다.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도운은 냉수 이 리터 벌컥벌컥 들이키고는 했다.
어 김원필 아냐?
어
너 벌써 애인 갈아치웠냐?
뭐?
저번에 그 여친은 나도 좀 별…
무언가 날아갔는데 그게 식기는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알고 보니 그것은 윤도운의 오른쪽 주먹이어서 사실은 다행이 아니었다. 다시 한번 말해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건 개쎈 고등학교 이 학년이었기 때문이다. 누가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원래 이 학년은 센 거다. 그것도 아니면 사랑의 힘이다. 청춘.
세 대쯤 주먹을 날리고 나니 정신을 퍼뜩 차린 원필이 도운을 데리고 도망쳤다. 잡히기 전에 도망가자. 말없이 잡은 원필의 손은 따뜻했다. 일곱 살 때의 그 감각과 다른 것이 하나도 없었다. 김원필은 김원필이었고, 윤도운은 윤도운이었다.
미안해 사람 때려서
됐어
근데 나는?
저런 새끼도 좋아해주면서…. 주먹도 날려봤으니 윤도운 지리는 고백도 날려보는 거다. 사실 뛰어오면서 고민하던 것들은 이미 저 먼 발치에 내려놓고 왔다. 나는 아직도 안 돼? 더 기다리면 돼? 사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냐 묻기보다는 더 기다리면 되긴 되는 거냐고 물어보는 것이 도운의 성격이었다. 무르게 단단한 사람이란 이런 사람을 말하는 거라고 원필은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언제 좋아해
언제 좋아해 줄 거야?
도운은 담담하게 악을 쓴다. 첫 기억부터 매순간마다 만들어지는 마지막 기억은 온통 원필이다. 제가 형을 더 잘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 공부보다 꾸준히 해온 것은 사랑밖에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안다. 소리없는 아우성이란 이런 것이었다. 딸기 우유에 작게 담아 왔던 말들.
사실 김원필이 윤도운을 좋아하지 않은 적도 딱히 없다. 매번 세 달을 못 넘기고 헤어진 건 자꾸 윤도운과 비교를 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눈을 질끈 감고 데이트를 하러 가고는 했었는데, 덕지덕지 제 물건에 묻은 윤도운의 자취가 향 좋은 향수 같아서 뗄래야 뗄 수가 없었다. 윤도운은 김원필에게 극복할 수 없는 익숙함이었다. 익숙하길래, 사랑이 아니라고도 생각했었지만 결국 사람 사이를 돌고 돌다 보면 집 문에는 도운이 사다 걸어 놓은 편의점 봉지가 있었다. 빨대 없이 먹은 적 없는 딸기 우유로 인해 사랑을 느끼기도 한다. 윤도운은 사소했지만, 어디에나 있었다.
좋아하는 마음을 자각하는 순간은 언제가 예고 없이 찾아온다. 같이 살 부대끼며 선풍기 바람 맞다가 눈이 맞는 경우도 허다하고, 그냥 꽃잎 흩날리는 모습이 예뻐서, 그 날의 날씨가 좋아서인 경우도 있다. 원필의 경우는 딸기 우유라고 할 수 있었다. 도운은 딸기 우유로 계속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날의 날씨는 지나치게 맑았고, 습했고, 더웠다.
떡볶이 먹은 날 우연히 들려오던 그 노래를 다시 떠올린다. 둘이 되는 건 이제 자신이라는 생각에 유치한 뿌듯함이 입가에 떠돌았다. 삼 분 오십오 초 짜리 노래는 반쪽을 뺏긴 채 끝났는데, 윤도운 첫사랑은 반을 돌려받아서 둘이 됐다. 일과 이분의 일 말고, 그냥 투투가 됐다. 김원필과 윤도운이라는 이름의 투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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