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ONE and ONLY

2020. 6. 20.fic

- 널 생각해
trigger warning : 투신 자살 시도에 대한 묘사가 있습니다.

 

 

 

 

 

입학식 날은 으레 그렇듯 찬 바람이 불었다. 3월 하면 꽃피는 춘삼월일 것 같으나 현실은 롱패딩 양쪽 주머니에는 핫팩이 들어 있었다. 입춘은 한참 지났는데 봄은 무슨 아직 한참 겨울 같기도 했다. 도운은 강당에 가지런하게 놓여 있는 간이의자에 비뚤게 앉아 혼자 손장난이나 치고 있었다. 빳빳하게 다려진 셔츠 깃이 조금 불편하게 느껴졌다. 첫 교복이 아닌데도 영 어색하게 느껴지고 몸이 굳는 이유는 제가 살던 창원을 떠나 서울로 고등학교를 진학했기 때문이리라.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온 지 한 달. 그야말로 갓 상경한 촌놈이나 다름이 없었다. 다른 학생들은 벌써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야 너 4반이랬나? 너희 담임은 누구래? 너 아는 선배 있어? 따위의 얘기들이 들렸다. 목소리에 설렘이 그득그득 묻어있었다. 그에 비해 윤 도운이는 참으로 막막했다. 친구는 우예 사귀노. 열일곱 고딩 윤도운은 혼자 손가락 만지작만지작 발 토독토독 소심하게 구르며 입학식이 빨리 시작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기.”

 

낯선 목소리와 함께 뒤에서 누가 톡톡 자신을 두드렸다.

 

?”

 

도운은 멍청한 소리나 내며 몸을 뒤로 돌렸다. 보이는 것은 가슴팍에 달린 노란 명찰. 몇 학년인지는 모르겠지만 선배인 것 같았다.

 

아 그 미안한데 단상 지나가야 해서. 다리 좀 넣어줄 수 있을까요?”

 

동글동글 코코볼 같은 사람이 말을 했다. 와 사람이 눈이 저래 클 수가 있나. 멍하니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꿈뻑꿈뻑. 대답 없이 쳐다보기만 하자 코코볼 같은 선배는 큰 눈을 도륵도륵 굴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 저기? 혹시 다리 좀…….”

 

같은 말을 두 번 듣고 나서야 도운은 상황 파악이 됐다. 얼 타느라 나갔던 정신이 확 들면서 아, , !! 죄송함니더. 도운은 다리를 집어넣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귀가 빨갛게 달아오른 게 느껴졌다. 하이고, 이게 첫날부터 뭔 창피고. 미칫다. 윤도운…….

 

어 그렇게 안 미안해해도 되는데. 고마워요!”

 

동글동글한 선배가 도운에게 살짝 웃어 보인 뒤 빠르게 앞으로 가로질러 나갔다. 뒤통수도 동글동글. 멍하니 코코볼 선배 뒤통수나 쳐다보고 있는 것도 잠시, 곧 입학식이 진행된다는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흘렀다. 신입생 여러분들은 각 반의 자리로 돌아가 주시기 바랍니다. 하는 소리와 함께 저들끼리 한창 이야기를 나누던 애들이 각자의 반을 찾아갔다. 도운 혼자 멀뚱히 앉아있던 1학년 2반의 빈 의자가 속속들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도운은 그저 코코볼 선배를 눈으로 찾고 있었을 뿐이었다. 잠깐 안내사항을 듣는 사이 사라졌다. 아 얼굴을 볼 게 아니라 명찰을 봤었어야 했는데. 순식간에 지나간 일이어서 어쩔 수 없었지만, 자신의 판단미스에 도운은 한껏 아쉬워하며 속으로 한숨이나 쉬고 있었다.

 

 

 

.”

 

, ?”

 

도운의 옆자리에 막 앉은 애가 말을 걸었다. 체격이 도운보다 좀 크고 눈매가 좀 매서운 애였다. 그 시선에 괜히 위축된 도운은 쭈굴쭈굴하게 답하고는 곧장 후회했다. 아 방금 너무 찌질했는거같은데 우야노.

 

너 어느 중에서 왔어? 못 보던 얼굴인데. 학원 안다니냐? 학원에서도 못 봤던 거 같은데.”

 

아 그. 내는, 창원에서 올라온 지 얼마 안 되가.”

 

헐 대박, 오 그러고 보니까 사투리 쓰네. 너 그럼 이사 온 거?”

 

그건 아이고. 그냥 내 혼자…….”

 

오 그럼 자취하는 거? 개쩐다. 서울은 언제 올라왔어? 아니다 그 전에 통성명부터 해야지. 너 이름이 뭐야? 난 이진서.”

 

그제야 옆에 앉은 남자애의 왼쪽 가슴팍에 시선이 갔다. 이 진 서. 진서구나. 진서는 날카로운 첫인상과는 달리 꽤 살가운 편인 것 같았다. 덕분에 도운은 한껏 긴장했던 어깨에 힘을 좀 풀 수 있었다.

 

여기 명찰 보이지? 넌 이름 뭐냐.”

 

, 나는 윤 도운.”

 

도운은 대답하며 롱패딩 지퍼를 끌어 내렸다. 옷을 젖혀 제 왼쪽에 달린 명찰을 진서에게 보여줬다.

 

윤도운. 오키. 잘 지내보자. 나 좀 인싸라서 친구 많거든? 친구 사귀는거 걱정은 말고. 이 형님이 다~ 도와준다.”

 

아 맞나. 그래. 고맙다.”

 

어느새 몸을 돌려 시선을 마주한 진서가 웃으며 말했다. 도운도 그에 맞춰 어색하게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렸다. 서울 아들은 다 깍쟁이라더니, 것도 아닌 갑네. 상경 후 처음 사귄 친구였다. 도운은 내심 안도감을 느끼며 의자에 몸을 좀 더 깊숙이 기댔다.

 

 

 

입학식은 지루했다. 교장 선생님, 학교운영위원장, 지역구 국회의원 등 다양한 사람들의 축사는 항상 쓸데없이 길었다. 옆에 앉아있던 진서 역시 지루했는지 몸을 이리저리 비틀다가 도운에게 말을 걸었다. 대부분은 모르는 얘기였지만 도운은 열심히 들으면서 맞나. 글나. 하며 맞장구나 치고 있었다. 질문에는 나름 성심성의껏 답도 했다. 서울은 왜 혼자 올라왔냐는 질문에 악기를 한다고 말했고, 자신도 악기를 한다고 눈을 빛내며 무슨 악기를 하냐는 말에는 드럼 친다고 대답했다. 어 나는 일렉 치는데. 야 여기 밴드부 대박이야. 너도 지원 할거지? ... 잘 몰겠는데. 아마 글치 않을까.

 

 

 

서울이 더 학원이 많고 기회가 많아서 혼자 올라오게 됐다는 얘기까지 했을 즈음, 진서가 오 야 저기 봐봐. 하고 도운의 시선을 돌렸다. ? 하고 시선을 돌린 곳에는 아까 그 코코볼 선배가 있었다. 손에 파일 같은 걸 들고 단상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 서 있는 사람은 틀림없이 아까 그 사람이 맞았다.

 

저 형이 김원필이라고, 여기 전교 회장이거든? 존나 유명해. 나랑 같은 중 나왔는데 공부도 잘하고 아까 축사 한 국회의원 있지? 그 사람 아들. 진짜 개 잘살아. 근데 진짜 착하고 완 성격도 좋아. 피아노 치는데 같은 남자가 봐도 존나 멋있어. 맨날 무슨 콩쿠르만 나갔다 하면 1등 타서 오고 천재라고 기사도 몇 번 나고. 하여튼 진짜 존나 유명해.”

 

 

 

옆에서 진서가 속사포처럼 원필에 대한 말을 쏟아냈지만, 도운은 멍하니 원필의 모습만 쳐다보고 있었다. 원필은 단상 아래에서 조금은 긴장한 듯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손에 들고 있는 걸 읽기도 하고, 아 아 하면서 목을 푸는 모습도 보였다. 도운은 그 모습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야 들었냐? 옆에서 진서가 도운을 툭 쳤다. ? .

 

 

저 선배 이름이 뭐라고?”

 

김원필. ? 관심있냐?”

 

아이. 그냥. 음악 한다니까. 어쩌면 자주 보지 싶어가꼬.”

 

아 근데 원필이 형은 클래식. 우리는 실용음악이잖아. 저 선배 동아리도 영재 동아리임. 우리 형이랑 같은 동아리라서 알어. 우리 형도 여기 다니거든.”

 

아 맞나.”

 

하긴 근데 저 선배가 음악쌤한테 허락받고 구관 음악실 연습할 때 쓴다던데 밴드부실이 구관에 있으니깐. 마주칠 일이 있을 수도 있긴 하겠다. 너 밴드부 할 거 아냐? 밴드부 할 거지?”

 

, 아마 그러지 싶다.”

 

사실 밴드부를 해야겠다고 생각은 안 했었는데 도운은 그 말을 듣고 밴드부를 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뒤이어 전교 회장 김원필 학생의 신입생 입학을 환영하는 축사가 있겠습니다.”

 

김원필. 이 세 글자에 강당이 조금은 술렁였다. 원필은 진서의 말마따나 꽤 유명인사인 모양이었다. 원필은 단상 위에 올라 흠흠. 하고 목을 살짝 가다듬더니 축사를 시작했다. 신입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한재고등학교 제27대 전교회장 김원필입니다…….

 

 

 

축사의 내용은 딱히 귀에 들어오지 않았으나 스피커를 타고 강당에 울려 퍼지는 원필의 목소리는 정확히 도운의 귀에 꽂혔다. 칵테일 파티 효과라고 하던가, 주변이 꽤나 웅성웅성 한데도 도운에게는 원필의 목소리만 오롯하게 들렸다. 또박또박한 말씨와 미성의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입학을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살짝 뒤로 물러나 반듯하게 앞에 한번 뒤에 한 번 인사하고 원필은 단상 아래로 내려갔다. 신입생들의 시선이 제게 꽂히는 게 조금은 쑥스러웠는지 뺨이 살짝 달아올라 눈을 접어 웃는 모습이 되게. 예뻤다. 서울은 남자 아도 저래 사근사근하나. 도운은 그런 생각이나 하며 원필의 웃는 얼굴을 머릿속에서 지우려 애썼다. 간질간질한 기분이 영 이상했다.

 

교가 제창을 마지막으로 제29회 한재고등학교 입학식을 마치겠습니다. 신입생 여러분들의 입학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입학식이 끝났다. 도운은 머리를 휙휙 저어내며 진서를 따라 제 교실로 향했다. 윤도운의 본격 서울 생활 시작이었다.

 

 

 

 

 

 

 

ONE and ONLY

 

 

w.

 

 

 

 

 

 

고등학생이 되니 시간은 더 빠르게 지나갔다. 어느새 한 학기와 방학이 지나고 2학기의 시작이었다. 그 사이에 도운은 학교에 제법 잘 적응했다. 자칭 인싸라던 진서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는지 친구가 많았다. 진서의 공이 크기도 했고 순둥하니 허옇게 잘 생긴 도운의 비주얼과 밴드부 드럼이라는 타이틀도 한몫을 했다. 학업에는 뜻이 영 없는 도운인지라 수업시간에는 허구한 날 엎어져 있어 선생님들에게 불려 지문을 읽거나 꾸지람을 듣는 일도 허다했다. 그때마다 눈에 띄게 어쩔 줄 몰라하며 달아오르는 귀에 선생님들에게도 제법 귀염을 받았다. 밴드부 연습을 핑계로 잘 쓰이지도 않는 구관을 들락거리며 원필과 얼굴을 텄고, 어색하지만 인사 정도 하는 사이가 되었다.

 

 

 

정말 인사 정도만.

 

 

 

그렇게 한 해가 지나도록 그렇다 할 진전은 없었다. 가끔 계단이나 구관에서 도운과 마주친 원필은 늘 웃음을 지으며 도우니 안녕? 하고 인사를 건넸고 도운은 어색하게 고개나 숙이며 걸음을 빨리했다. 제 붉어진 귀를 죽어도 보이기 싫은 탓이었다. 귀는 무슨 원필만 마주치면 목까지 시뻘겋게 달아올라 어찌할 수가 없었다. 추한 모습은 죽어도 보이기가 싫었다. 특히나 가을에 있었던 축제 때는 고역이었다. 축제 사회를 맡은 원필과 학교 축제의 피날레 밴드부인 도운은 리허설 등으로 마주칠 일이 참 많았고 그때마다 도운은 나대는 심장을 가라앉히려 무던히 애를 써야 했다.

 

 

 

도운은 곧 2학년, 원필은 3학년이었다. 입시를 준비해야 하는 원필은 바람이 차가워지면서부터 구관에 발걸음을 끊은 건지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아쉬움이 없다면 거짓말이었다. 내년에 선배는 더 바빠지겠지. 얼굴 까짓거 좀 빨개지면 어떻노. 그냥 말 좀 더 붙여볼 걸 이 멍청아. 도운은 바람이 차가워질수록 같은 생각을 반복 또 반복했다. 등교할 때마다 이번에 원필 선배 마주치면 꼭 한 마디라도 더 붙여봐야지. 다짐했지만 원필은 구관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치. 마이 바쁘겠지. 연이 아니었나 갑다……. 저도 잘 모르겠는 제 마음이 갈무리가 어려웠다. 처음 본 순간부터 반짝반짝 빛이 나던 사람. 도운은 원필을 그렇게 생각했다. 우상. 선망의 대상 같은 거. 항상 다정하고 따뜻하지만, 심지가 곧고 절대 자만하지 않는 사람. 착하고. 예쁜 사람. 아무래도 그런 사람이랑 연을 못 이어나간 게 못내 아쉬움이 컸다.

 

 

 

그렇게 겨울방학이 시작되고 해가 변했다.

 

 

 

 

 

*

 

 

 

 

 

18살이 된 도운은 매일 똑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학원 집 학원 집. 이제는 눈을 감고 걸어도 갈 만큼 익숙한 길이었다. 힘들긴 했지만 지치지 않았고 미래는 다들 그렇듯 불투명했지만 하고 싶은 게 확고한 도운은 서울의 생활을 잘 즐기고 있었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던 매일에 이벤트가 하나 생겼다. 반 배정 결과와 교과서 배부 등을 이유로 학교에 한 번 들러야 했다. 교복 어디다 뒀더라. 옷장을 뒤적거린 도운은 형편없이 구겨져 있는 와이셔츠를 보곤 고개를 저었다. 그냥 체육복이나 꿰어 입고 학교에 갔다. OT라면서 쓸데없이 기강을 잡는 학교는 어김없이 교문에서 도운을 잡아챘고 도운은 십오 분간 등교하는 학생들 옆에 서서 교복을 단정히 입읍시다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쳐야 했다.

 

 

 

교문에서 잡힌 덕에 친구들보다 교실에 조금 늦게 도착한 도운은 간신히 마지막으로 1학년 담임선생님께 반 배정표를 받을 수 있었다.

 

 

 

14번 윤도운 2학년 8.

 

 

 

쩌 선생님. 2학년 8반이 우데 있을까요?”

 

도운은 어색하게 웃으며 선생님의 눈치를 살살 살폈다. 귀염 떠는 도운의 모습에 한껏 미소를 지은 담임선생님이 도운에게 교실의 위치를 알려줬다.

 

“B4층으로 가. 우리 도운이. 2학년 돼서도 드럼 열심히 치고. 수업시간엔 좀 덜 자고!”

 

예 알겠슴다 쌤 한 해 동안 감사했으요!!”

 

응 그래. 얼른 가봐라. 애들 다 가 있겠다.”

 

!”

 

 

 

쓸데없이 씩씩하게 대답한 도운은 4층으로 뛰었다. 원래 교실은 1층이었던 탓에 다 도착했을 즈음엔 숨이 달렸다.

 

 

 

2학년 8. 뒷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다행히 선생님은 아직 오지 않으신 듯했으나 반 분위기가 마냥 시끄러운 것도 아닌 게 이상하게 어수선했다. 이게 뭔 분위기고. 문 앞에 가만히 서 있던 도운은 너 뭐하냐? 라는 진서의 목소리를 듣고 어엉 너도 8? 하며 교실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 듬성듬성 비어있는 자리를 보니 제일 늦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앞을 보니 칠판에 좌석표 같은 게 붙어있었다. 아는 사람 있어서 다행이다. 같은 생각이나 하며 자리를 확인하러 발걸음을 옮겼다. 제 이름을 바쁘게 찾던 도운의 시야에 익숙한데 낯선 이름이 들어왔다.

 

 

 

 

8번 김원필

 

 

 

도운이 알기로는 저와 같은 학년에 김원필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애초에 김원필이라는 이름이 흔한 이름이 아니었다. 묘한 분위기는 이 때문이었나보다. 전교에서 원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리 학교에 관심 없는 애라도 김원필은 알았다 도운은 아직도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게 뭐고. 뭐 전학생이라도 온 거 아이가?”

 

제 자리에 앉은 도운이 뒷자리에 앉아있는 진서에게 물었다. 도운은 윤 씨 진서는 이 씨인 탓에 진서와 도운은 자리가 가까웠다.

 

야 전학생 오면 맨 뒷번호 받잖아. 이거 완전 이상해 지금. 어디 다쳤다는 썰도 있고.”

 

다쳤다고?”

 

. 나도 우리 형한테 들은 건데 자세히는 모르고. 아니 애초에 원필이 형네 장난 아니잖아. 아빠 국회의원에 엄마가 J전자 사장이니깐. 말 다 했지 뭐. 그래서 소문 다 막았나 봐. 언론도 막고. 형도 자세하게는 모른대. 학교도 작년에 축제 끝나고 좀 있다부터 아예 안 나왔잖아. 난 무슨 어디 해외 콩쿠르 간 줄 알았는데 아닌가 봄.”

 

 

 

도운은 처음 듣는 소식이었다. 단순히 이제 곧 고삼이고 그러면 본격적으로 입시 준비를 해야 하니까 바빠진 원필이 안 보인다고 생각했었다. 워낙 주변 소식에 무뎠던 도운인지라 원필이 학교를 나오지 않았단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이제 보니 같은 반 애들 모두 저와 진서가 했던 얘기와 비슷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도운은 이 소란스러움이 거북했다.

 

 

 

 

*

 

 

 

 

 

자자. 친구들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지?? 그래도 잠깐만 조용히 하자. 빨리 끝내줄게.”

 

담임선생님은 작년에 도운을 가르쳤던 남자 체육 담당이었다. 젊고 수업시간에 애들하고도 잘 놀아 인기가 많은 선생님이었다. 나이스. 반 친구들이 좋아하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도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자꾸 어딘가 마음이 불편했다. 빨리 진서가 얘기한 저 소문의 진상을 알고 싶었다. 3학년이어야 하는 김원필이 왜 2학년에 이름이 적혀 있고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는지.

 

 

 

담임은 빠르게 전달사항을 전달하고 교과서를 배부했다. 도운은 내내 속이 복잡했지만, 딱히 어디 말할 곳도 물을 곳도 없어 주저하고 있었다. 교과서를 다 받은 친구들은 빠르게 교실을 빠져나갔지만, 도운은 부러 느리게 가방을 챙기곤 교실을 나섰다. 발걸음은 집이 아닌 교무실로 향했다. 문을 조심히 열곤 선생님을 불렀다.

 

 

 

저 선생님.”

 

어 도운이. 안 그래도 부탁할 거 있었는데. 잠깐 안으로 들어올래?”

 

원필이 알지? 하고 운을 뗀 선생님의 부탁인즉 원필의 교과서를 대신 받아 보관해달라는 것이었다. 원필이 언제 다시 학교에 나올지도 모르고 하필 교과과정이 바뀌어 교과서가 싹 다 바뀌었다고 했다. 주소 보니까 도운이 네가 학교에서 제일 가까이에 살길래. 무겁고 귀찮겠지만 왔다 갔다 한 번만 부탁할게. 아 예 별일도 아인데요 뭐. 응 그래 고맙다. 근데 교무실엔 무슨 일로 왔어?

 

원필 선배가 왜 저희랑 같이 다니는지 모르겠어가꼬.”

 

. 그렇지.”

 

선생님은 곤란한 듯 머리를 쓸어올리며 고민하는 기색을 비쳤다가 이내 말을 이었다.

 

 

 

원필이 쪽에서 얘기하기 전까지는 먼저 얘기를 안 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 일단 얘기해 줄 수 있는 건 원필이가 작년에 좀 다쳤어. 다쳐서 학교를 오래 못 나왔거든. 출석 일수를 다 못 채워서 3학년으로 진급이 안 됐어. 그래서 한 학년 더 다니는 거고 선생님이 전달받은 거는 지금 재활치료 중이라고 하더라고. 아마 다음 달 좀 넘어서부터 학교 나올 것 같아. 원필이 학교 나오면 우리 도운이가 잘 좀 챙겨줬으면 좋겠네. 부탁해.”

 

……. . 알겠습니다.”

 

도운은 속이 잔뜩 심란했다. 어디가 어떻게 다친 건지도 얼마나 다친 건지 원필에 대한 소식을 모른 채 그냥 흘려보낸 시간을 후회했다. 왜 그냥 바빠서라고 생각했지. 출석 인정을 못 받을 만큼 학교를 못 나온 거면 제법 크게 다쳤단 얘기였다. 병문안 한 번 못간 제가 미웠다가도 그럴 사이가 아니었다는 걸 자각하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2학년이 됐다고 같은 반 친구들은 부쩍 성적에 신경 쓰기 시작했다. 2학년 교실로 등교하며 나이 한 살 바뀌었다는 걸 실감하던 3월은 빠르게 지나갔고, 벚꽃이 피기 시작했다. 벚꽃의 꽃말은 수행평가. 친구들의 대부분은 몰아치는 수행평가에 정신을 못 차렸고 그 시기가 좀 지나 한숨 돌리려 하니 벚꽃은 다 지고 초록빛이 무성해지기 시작했다. 곧 있으면 중간고사라며 애들은 단체로 우는소리를 했다. 예체능인 도운은 그저 그렇게 수업을 듣고 그저 그렇게 점수를 챙기며 별다를 거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달라진 게 하나 있다면 수업시간에 엎어져 잠을 자는 대신 창가 쪽 빈 원필의 자리를 바라보는 시간이 늘었다는 것이었다.

 

 

 

학교 가까이 사는 애가 지각을 제일 자주 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순리였다. 도운은 자주 지각은 아니고 종이 침과 동시에 등교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 윤도운 또 세이프. 원래 같았으면 제 바로 옆 분단에 앉는 진서가 도운을 툭툭 치며 말했어야 했는데 진서는 오늘따라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가방걸이에 메신저 백을 건 도운이 손부채 질을 하며 눈을 도륵 굴렸다. 뭔가 분위기가 마가 떠 있었다. 시험 직전이라 그른가. 영 이상하네. 수업 준비를 빠르게 마친 도운은 습관처럼 빈자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

 

 

 

자리가 비어있지 않았다.

 

 

 

1교시 내내 도운은 정신이 빠져 있었다. 수업이 시작한 직후 도운은 원필의 교과서가 저의 집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곤 속으로 진땀을 뺐다. 다행히 첫 시간은 자습이었다. 시험 직전이라 이미 진도가 다 나가 있는 과목이 대부분이었다. 도운은 내내 원필을 힐끗댔다. 원필은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 이따금 창밖을 내다보는 모습도 보였다.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쳤고 몇몇 애들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원필은 그저 가만히 자리에 앉아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교실에 내내 자신 때문에 애매하게 흐르는 이 기류가 못내 불편한 모양이었다. 원필은 발걸음을 옮기려 했지만, 도운이 한발 빨랐다.

 

 

 

, , 선배.”

 

. 도운이네. 안녕.”

 

원필은 늘 그랬듯 웃는 얼굴로 도운에게 인사를 했다. 도운은 그 미소가 왠지 모르게 안쓰러웠지만 딱히 티 내지 않고 용건을 전했다.

 

선배 책이 저희 집에 있어갖고. 제가 낼 갖다 드리께요. 오늘은 제껄로 수업 들으시고요.”

도운이 시간표에 맞춘 교과서를 원필의 책상 위로 턱 얹었다. 어 아니 괜찮은데.

 

저는 수업 딱히 잘 듣지도 않아가. 제가 오늘 선배가 오시는지 몰라가꼬 책을 못 가져 왔거든요. 그냥 오늘은 이걸로 수업 들으시고 제가 내일 꼭 갖다 드릴게요.”

 

. . 알겠어. 고마워.”

 

원필은 자리에 다시 앉아 도운이 건넨 교과서를 서랍에 넣어 정리했다. 도운은 그 모습을 가만히 서서 지켜봤다. 자리를 옮길 생각도 못 한 채 서 있다가 원필의 왼쪽 가슴팍에 시선이 꽂혔다. 작년과는 다르게 하얀 배경에 김 원 필 박힌 석 자가 못내 어색했다. 도운의 시선을 느낀 원필은 고개를 들어 도운을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귀가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저 선배 그럼, , 다음 시간 준비하세요. 하고 제 자리로 도망치려던 도운을 원필이 잡았다.

 

도운아 근데,”

 

, ?”

 

나 이제 선배 아니잖아.”

 

. 도운은 원필의 말에 멍청하게 앓는 소리나 냈다. 원필의 말마따나 원필은 이제 도운에게 선배가 아니었다. 그렇게 말하는 원필의 눈에는 언뜻 씁쓸한 기색이 비쳤다가 사라졌다. 도운은 어. . 계속해서 멍청한 소리나 내다가 말했다.

 

 

 

, 그럼. 지가 횽님이라고 불러도.”

 

묘한 긴장감에 도운과 원필의 대화 말고는 정적뿐이던 교실에서 풉. 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졌다. 쓸데없이 목소리가 크게 나간 탓이었다. 아씨 이 멍청이 윤도운아. 도운은 목까지 벌겋게 달아올라서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야 니가 무슨 조폭이냐? 형님이라고 하게.”

 

어느새 도운의 옆에 다가온 진서가 도운을 툭 치며 말했다. 아니 우리는 그래 말해도 안 이상하그든. 도운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갔다. 진서는 아 예 예 도운이 행님~ 하며 도운을 놀려먹곤 원필에게 익숙하게 말을 붙였다.

 

형 저 알죠. 저 진서예요. 이윤서 동생 이진서.”

 

으응 진서 알지. 진서두 안녕.”

 

앞으로 친하게 지내요. 저 형이랑 친해지고 싶었거든요. 얘도 형 엄청 좋아해요. 맨날 밴드부에서. .”

 

하하 아가 뭔 소리를 하노. 그 원필, 원필이형. 지도 형이라고 하께요. 다음 시간 준비 잘 하세요!”

 

진서의 입을 틀어막은 도운이 원필과의 대화를 황급히 마무리했다. 어차피 그래 봤자 같은 교실 안이어서 도망갈 곳도 없었다. 니는 와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그라는데. 밴드부 내에서 도운은 김원필 빠돌이로 유명했었다. 늘 무뎌서 남한테 별 관심이라곤 없는 도운이 밴드부실에 들어서며 오늘 원필 선배는 안 왔나. 하거나 종종 혼자 연습하러 밴드부실에 간다고 해놓곤 음악실 앞 복도에 다리를 모으고 앉아 있는걸 부원들에게 몇 번 들킨 탓이었다.

 

 

 

도운과 진서가 원필과 대화를 나눈 이후로 같은 반 아이들도 하나둘 원필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붙이기 시작했고 원필도 그럭저럭 한 살 어린 같은 반 친구들과의 생활에 적응을 잘 해 나갔다. 도운은 교과서를 전해준 이후로는 원필과 이렇다 할 접점이 없었고, 가끔 구관 음악실 앞에서 원필을 기다렸다. 하지만 도운의 기다림이 무색하게 원필은 음악실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

 

 

 

 

 

점심시간에 기약 없이 원필을 기다린 게 두 달쯤 시간이 흘렀다. 날이 더워져서 하복을 꺼내 입은 지는 한참이었다. 급식을 빠르게 먹은 도운은 축구를 하자는 친구들의 말에 인상을 한번 찌푸리고는 날도 더운데 뭔 축구. 연습이나 하러 갈란다. 대답하며 어김없이 발걸음을 구관으로 향했다. 구관 음악실은 밴드부 연습실보다 코너 하나 전에 있었다. 원필을 좀 기다려 보다 부실로 들어갈 작정이었다.

 

 

 

평소와 다르게 굳게 닫혀 있던 음악실 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도운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열린 문틈 사이로 슬쩍 쳐다본 음악실 안에는 그토록 기다리던 원필이 있었다. 더운 날씨에도 밝은 회색 후드집업을 걸친 모습에 동글동글한 다갈색 뒤통수는 분명히 원필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음악실 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도운은 문고리를 잡고 그대로 굳을 수밖에 없었다. 울음소리 같은 게 들렸기 때문이었다. 원필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피아노에 손을 뻗었다가 거두었다가를 반복하더니 이내 만지지도 못한 채 주저앉아 무릎에 고개를 파묻고 울었다. 도운은 보면 안 되는 모습을 본 것 같았다. 문고리에서 손을 조심히 뗀 도운은 밴드부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쳤다는 말이 손을 다쳤다는 말이었던 거였나. 더위가 한창인데도 꼬박꼬박 손을 다 덮는 후드집업을 챙겨 입는 원필을 보곤 몇몇이 덥지 않으냐고 물었었다. 질문에 어색하게 웃으며 더위를 별로 안 타서 괜찮다 대답하던 원필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자신이 그동안 묘하게 느꼈던 원필의 눈빛은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되는 것이었나. 아마 원필은 앞으로 음악실에는 다신 오지 않을 것 같다는 직감이 섰다. . 죄 없는 베이스 드럼 페달이나 한번 세게 밟았다. 도운이 할 수 있는 건 원필의 울음소리가 드럼 소리에 묻히게 하는 것밖에 없었다. 도운은 평소보다 힘을 좀 더 실어 드럼을 쳤다.

 

 

 

 

 

*

 

 

 

 

 

그날 이후 원필은 아무렇지 않은 듯 학교생활을 이어나갔다. 교실에서 내내 하는 거라곤 몰래 김원필 관찰하기 밖에 없는 도운 만이 원필이 정말 아무렇지 않은 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날 일에 대해서 말을 꺼내기도, 묻기도 뭐했다. 주제넘은 짓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는 원필에게 도운도 그냥 아무렇지 않은 척 평소와 같이 대했다. 가끔 모르겠다며 영어 지문을 들고 가서 핑계 삼아 말을 붙이고, 눈이 마주치면 어색하게 웃어 보이고. 그 정도.

 

 

 

점심시간이면 구관에 붙어 있던 도운은 목적을 잃었기에 밴드부 연습이 없는 날이면 딱히 구관을 찾지 않았다. 대신 옥상을 자주 찾았다. 옥상 한쪽 그늘진 구석에 누워 이어폰을 끼고 바람이나 맞으며 누워 있는 걸 즐겼다. 한여름이라 후덥지근했지만 그래도 하늘이 청명해 좋았다. 도운은 옥상이 꽤나 마음에 들어 학교를 마친 후에도 종종 올라가 해가 지는 걸 구경하곤 했다. 해가 떨어질 때쯤이면 바람도 선선하게 불어 좋았다.

 

 

 

도운은 오늘도 어김없이 학교를 마치고 옥상으로 향했다. 옥상은 원래 학생 출입 금지인 구역이라 몰래 들어가야 했다. 밴드부실에서 시간을 어영부영 때우다 선생님들이 하나둘 퇴근할 때쯤 올라갔다. 문을 조심스럽게 열자마자 보인 건 텅 비고 탁 트인 시야가 아닌 웬 인영이었다. 난간에 살짝 기대 바람을 맞고 있었다. 저래 서 있으면 위험할 긴데. 누구지? 도운은 조심스럽게 발을 문 너머로 내디뎠다. 어쩐지 뒷모습이 익숙했다. 동글동글하고 단정한 다갈색 머리에 마른 몸. 평소 걸치고 다니던 후드집업이 없어 긴가민가했으나 원필이 분명했다. 뒷모습이 왠지 모르게 처연해 보여 말을 걸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도운은 원필에게 그렇게 기대고 있으면 위험하다고 말할 심산으로 다가가려 했다.

 

 

 

그 순간 갑자기 원필이 난간을 지탱하는 턱을 밟고 섰다. 팔에 힘을 주고 한쪽 다리를 난간 위로 확 올렸다. 그 일련의 동작을 본 순간 도운의 머릿속에서 적색경보가 울렸고 도운은 한 손에 성의 없이 쥐고 있던 가방을 내던졌다. 도운은 그 자리에서 튕겨 나가듯 원필에게 달려가서 원필을 끌어안고 난간에서 떼어냈다.

 

 

 

쿠당탕탕.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도운과 원필은 옥상 바닥으로 넘어졌다. 넘어지면서 손을 잘못 짚은 듯 손목이 시큰했지만, 그딴 건 신경조차 쓰이지 않았다. 원필이 먼저였다.

 

형 미쳤어요??? 지금 뭐 하는 건데요?”

 

이거 놔.”

 

원필이 몸을 빼려 바르작대자 도운은 원필의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을 더 세게 줬다. 난간에서 떼어지면서 몸이 돌려진 원필은 도운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였다. 더 이상의 물리적인 저항이 소용이 없다는 걸 직감하곤 그저 도운의 품에 안겨 엉엉 울었다. 도운은 옷이 축축하게 젖어가는 걸 느끼며 다른 손으로 원필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형 왜 혼자 앓아요. 왜 아무한테도 안 털어놓고 혼자 그렇게 곪고 곪다 상처가 터지게 해요. 입 밖으로는 뱉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숨이 넘어가듯 우는 원필을 달래며 도운은 속으로 조용히 되뇌었다.

 

 

 

나 죽게 놔두지 왜 살렸어. 난 이제 아무것도 못 하는데 내가 왜 살아야 돼 니가 뭔데 날 살렸어 왜! 통곡하던 원필은 울부짖으며 날이 선 말을 내뱉었다. 도운도 알았다.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란 걸. 원필의 인생에 개입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상황을 넋 놓고 볼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도운은 원필이 무너져가고 있는 걸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었다. 원필의 빛을 잃은 눈이나 어딘가 힘이 빠진 듯한 미소, 수업시간에 창밖을 내다보며 멍 때리는 시간이 늘어가고 있다는 걸 도운은 알고 있었다. 원필이 형 그래도 괜찮나 봐. 원필이가 적응을 금방 잘 해서 다행이네요. 잘 이겨내고 있나 봐요. 별 탈 없이 학교생활을 이어나가는 원필에 학생 선생 할 것 없이 마음이 놓인다는 얘기를 했다. 도운은 그 얘기에 공감할 수 없었고 구관 음악실에서 우는 원필의 모습을 본 뒤에는 원필이 전혀 괜찮지 않다고 확신을 했다. 그럼에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고 그 결과가 지금 일어난 상황으로 이어진 것 같아 입이 썼다.

 

 

 

혼절할 듯 울며 자기를 죽게 내버려 두라던 원필은 자신도 모르게 도운에게 살려달라 했다. 자신이 아무리 때리고 밀쳐도 그냥 묵묵히 안아주고 토닥여주는 품에 저도 모르게 진심이 튀어나왔다. 도운아 나 좀 살려줘 나 좀 말려줘. 나 좀 살 수 있게 해줘……. 도운은 연신 알겠다고 대답하며 원필의 등을 마저 토닥였다. 저녁이 가까운 시간이었지만 너무 더운 날씨였다. 여기서 계속 울면 원필이 탈진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원필을 빠르게 달랬다. 형 여기서 계속 울면 쓰러져요…….

 

 

 

훌쩍훌쩍. 원필의 울음소리가 제법 잦아들었다. 도운은 원필의 몸을 저에게서 살짝 떼어내곤 원필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그제야 부끄러움이 확 몰려온 원필은 도운에게서 몸을 뒤로 빼냈다. 정신이 좀 드는지 부끄러워하는 얼굴이 다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도운은 입을 열었다.

 

 

 

형 좀 괜찮아요?”

 

“.......”

 

원필이 잔뜩 민망해하는 기색으로 대답했다.

 

집에 가입시다. 그럼.”

 

도운이 푸스스 웃으며 몸을 일으키려 손으로 땅을 짚었다.

 

 

 

!!”

 

도운이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단말마의 비명을 질렀다. 원필의 울어서 퉁퉁 부은 눈이 한껏 커졌다.

 

너 왜 그래?? 어디 다쳤어?”

 

도운은 손목을 붙잡은 채 주저앉아 있었다. 아까 뒤로 넘어질 때 시큰하던 손목이 꽤나 퉁퉁 부어있었다. 하이고. 이게 뭔 난리고. 요란하게 넘어지긴 했지.

 

. 별거 아이고,”

 

도운이 뭐라 하기 전에 원필의 손에 도운의 손이 덥석 잡혔다. 너 이거 지금 나 때문에 다친 거지? 어떡해 이거 너 드럼 치는데 손. 어떡해 빨리 병원, 병원 가보자 응?

 

원필이 발을 동동 구르며 도운을 재촉했다. . 아니 괘안은데요...

 

내가 안 괜찮아!! 빨리.

 

아까 울던 사람은 온데간데없고 소리를 빽 지리는 원필의 기백에 눌려 도운은 얌전히 원필의 발걸음을 쫓았다.

 

 

 

 

 

*

 

 

 

 

 

인대가 좀 놀랐네요. 살짝 늘어난 정도니까 너무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당분간은 손 쓰지 마시고요 한 2주 반에서 3주 정도 반깁스해보고 경과 봅시다. 많이 아프진 않죠??”

 

아 예. 괜찮습니다.”

 

네 그러면 진통제 처방은 따로 없이 깁스만 하고 가시면 되세요.”

 

저 혹시. 손을 자주 쓰는 데 문제는 없나요?”

 

. 이 정도는 간단한 부상이라 운동하시거나 정밀 작업 하시는 분들한테도 큰 무리 없으니까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네에. 감사합니다.”

 

환자분은 이쪽으로 따라오실게요.”

 

 

 

밖에서 기다릴게. 도운은 원필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필은 처치실로 들어가는 도운을 보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 수납대로 향했다. 윤도운 환자 결제할게요. 도운 몫의 치료비를 결제하곤 대기실 의자에 앉아 도운을 기다렸다. 혹여나 도운이 저처럼 될까 두려웠다. 꿈을 잃는다는 건 너무 두려운 거였다. 하나만 보고 전력 질주를 하던 원필이라 더욱 그랬다. 제 앞날은 하루아침에 무너졌고 하고 싶은 걸 못한다는 건 너무 괴로운 일이었다. 수술이 끝나고 정신이 든 뒤 제 양손에 칭칭 감겨있는 붕대를 봤을 땐 사고 났을 때 그냥 죽는 게 나았을 거라 생각했고, 재활을 마친 뒤에 피아노 전공은 어려울 거라는 말은 사망선고와도 같게 들렸다. 그때 김원필은 죽은 거나 다름이 없었다. 정말 도운이가 날 살려줄까. 사실 한 번 목숨은 구해줬으니 살려준 거나 다름없긴 했다. 살 수 있게 해 줄까. 왠지 도운이라면 정말 그럴 것 같았다.

 

 

 

아이 형이 계산하시면 우째요.”

 

상념에 잠긴 원필을 깨우는 목소리는 불만이 서린 듯한 도운이였다. 와 형이 결제하시는데요. 계좌번호 보내 주이소. 제가 그쪽으로 보낼게요. 얼마 나왔어요??

 

나 때문에 다쳤으니까 당연히 내가 내야지. 너 나 아녔음 다쳤을 일두 없잖아.”

 

아니 그래두. 죄송하게.”

 

내가 너한테 미안해해야 돼 지금. 너 나 때문에 당분간 드럼도 못 치잖아.”

 

그게 왜 형 탓이에요. 제가 손 잘못 짚은 탓이지. 진짜 계좌번호 주이소. 형이 이 돈을 와 내요.”

 

 

 

도운은 생각보다 강경했다. 나름 정색을 하고 말하긴 하는데 순한 얼굴은 화내 봤자 으르렁대다 마는 강아지 같았다. 으이구. 원필은 도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 도운은 멍청한 소리를 냈다.

 

 

 

도운아. 그러면 나 부탁 하나만 들어줘.”

 

, 뭐 들어드릴까요!”

 

쓸데없이 비장한 도운의 표정에 원필은 웃음이 났다.

 

너 혼자 산다고 했지.”

 

예 뭐. 그렇죠.”

 

나 오늘 너네 집에서 자구 가면 안 돼?”

 

???”

 

아니. 나도 얼마 전부터 혼자 살거든 근데. 오늘은 혼자 자기가 좀 무서워서.”

 

“......”

 

. 우리 별로 안 친한데 이런 부탁은 좀 그렇지? 미안.”

 

원필이 머쓱하게 웃으며 부탁을 무르려 했다. 오늘 하루 볼 꼴 못볼 꼴 다 보였다고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풀어졌나 보다. 도운에게는 무리일 부탁이 뻔했다.

 

? 아아아아아입니다. 그게 아이고 제가 방이 좁아가 햄이 불편하실까봐 그러지요. 형만 괜찮으시면 지는 괜찮심다!”

 

원필의 예상과는 달리 도운의 입에서는 긍정의 답이 나왔다. 안도한 원필은 도운의 마음이 바뀔까 빠르게 대답했다.

 

그럼 나 너네 집에서 자고 갈래.”

 

 

 

도운은 원필이 혼자 사는 줄도 몰랐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오늘 그런 일이 있었는데 혼자 자게 하는 것도 영 맘에 내키지도 않아 냉큼 수락했다. 도운의 집으로 향하는 길에 도운은 엉망진창인 제 방 상태를 기억해내곤 좌절했다. 학교 근처의 병원이라 도운의 집까지 걸어서 채 십 분이 안 걸렸다. 자취방 앞에 선 도운은 문을 따곤 원필에게 잠시만 기다리라 하고 쿵 문을 닫고 들어갔다. 원필은 굳게 닫힌 문 앞에서 눈을 껌뻑이다 안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부산스러운 소리에 웃었다. 기다림도 잠시 문이 벌컥 열렸다. 그 별거 없고 좀 너저분할긴데. 일단 들어오세요. 도운은 참 귀여웠다.

 

 

 

햇반에 도운의 어머니께서 보내주신 반찬으로 저녁을 해결하곤 각자 씻고 곧장 매트리스에 사이좋게 누웠다. 많은 일이 순식간에 지나간 하루여서인지 씻고 나니 긴장이 풀려 노곤노곤했다. 씻고 나온 원필은 도운의 츄리닝을 빌려 입은 차림이었다. 도운과 은근히 차이 나는 체구에 소매가 심하게 넉넉했다. 도우나 이거 내가 빨아서 갖다 줄게. 아이, 아니에요. 걍 놓고 가심 제가 빨래 한꺼번에 돌리께요.

 

 

 

도운은 매트리스를 큰 걸 고른 과거의 자신을 칭찬했다. 둘이 편하게 눕기에는 좀 좁았지만, 원필과 도운 둘 다 마른 체형인 탓에 크게 불편하진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먼 사람이라고 생각했떤 원필이 자신과 같은 향을 풍기며 자신의 옷을 입고 제 옆에 누워 있었다. 어째 목께가 간질간질한 기분이라 도운은 목을 벅벅 긁었다. 하이고야. 오늘 머가 이래 정신이 없노. 옆에 있는 원필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써 눈을 감고 자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도우나 자?”

 

막 잠들려던 참에 원필이 도운에게 말을 걸었다.

 

아직이요.”

 

목이 잠겨 한껏 더 낮아진 목소리로 도운이 대답했다. 원필이 너 목소리 진짜 낮당. 하고 웃으며 도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있잖아.

 

나는 너가 나 싫어하는 줄 알았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 그게 무슨 소립니꺼. 제가 형을 와 싫어하는데요! 도운은 잔뜩 억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그냥. 너 다른 애들한테는 형 형 하면서 잘 따라다녔으면서 나한테는 맨날 선배님이라고 했잖아. 마주치면 맨날 인사만 하고 지나가고. 그래서 난 너가 나 불편해하거나 싫어해서 선 긋는 건 줄 알았어. 난 너랑 친해지고 싶었거든. 드럼도 잘 치구. 농구도 잘 하고. 나 체육대회 결승 때 너네 반 응원했는데.”

 

 

 

의외였다. 도운은 원필이 자신을 거의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원필은 도운에 대해 생각보다 많은 걸 알고 있었고 도운과 친해지고 싶었다고 했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도운은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방이 어두워 보이지 않아 다행이었다.

 

 

 

, 아니. 지는 그런 게 아니고요. . 하이고, 이 부끄러워가 어째 말하노.”

 

 

 

바스락. 도운 쪽으로 돌아누웠던 원필이 낮은 도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 몸을 도운에게 가까이 했다. 도운의 목덜미에 가만히 숨을 쉬고 있는 원필의 숨결이 느껴졌다. 꿀꺽. 밤은 쓸데없이 조용했다. 훅 치고 들어온 원필에(전지적 윤도운 시점이다.) 도운은 한껏 긴장해 침을 꼴딱 삼켰고 그 소리가 크게 울렸다. 형한테 들렸겠지. 머리끝까지 달아올라 터질 것 같았다. 흠흠. 목을 살짝 가다듬은 도운이 입을 열었다.

 

 

 

그게, . 부끄러워갖고요.”

 

?”

 

아니. 그니까 형은, 공부도 되게 잘하시고. 인기도 많으시고 그른데 지는 그냥 암것도 아니니깐요. 막 말 걸기가 쪼꼼 그래가. 저랑 되게 다른 세계 사람? 같았거든요. 제가 보기에는 형이 처음 봤을 때부터 엄청 반짝반짝. 그래 빛나 보였으요. 제가 막 범접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리고 제가 부끄럼을 많이 타가지고. 귀나 얼굴이 되게 잘 빨개지는데 형한테는 추한 모습 보이기 싫어가꼬. 그런 거지 절대!! 절대!! 형이 싫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 형은 제 우상 같은 사람인데 지가 우째 형을 싫어함니꺼. 좋아하면 좋아했지.”

 

으응 그랬어? 도운아 근데 너 지금도 얼굴 빨갛다.”

 

원필이 가만히 듣다가 웃으며 도운의 뺨을 콕 찌르며 말했다. 에에?? 깜깜한데 그게 우째 보입니까. 놀리지 마요. 아니 진짜 보이는뎅. 달빛에 비쳐서 다 보여. 하이고. 도운은 우는 소리를 내며 이불을 뒤집어썼다. 원필은 끄항항 웃으며 그으랬구낭? 하고 도운을 놀렸다.

 

 

 

도운이 자신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건 이미 현서에게 들어 알고 있는 바였다. 도운이 교실을 비울 때면 현서가 원필에게 와서 쟤 저거 다 부끄러워서 저러는 거라고. 윤도운 우리 기수 사이에서는 별명이 김원필 빠돌이라고 다 일러바쳤다. 도운이 저를 어려워하거나 혹은 싫어한다고 생각하고 있던 원필은 그 얘기가 굉장히 의외였고, 한 번쯤은 도운과 얘기를 나눠보고 싶었다. 이렇게 도운의 자취방에 나란히 누워 나누게 될 줄은 몰랐지만.

 

 

 

솔직히 원필은 좀 울컥했다. 순수한 호감. 너무 오랜만에 받아보고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원필은 어느 정도 머리가 크기 시작하고서부터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숨겨야 했고, 그럴듯한 모습으로 자신을 포장했어야 했다. 그 포장된 모습과 원필의 뒷배경을 보고 다가온 사람들은 수없이 많았고 그건 시간이 갈수록 더했다. 자신과 엮여서 한 몫 챙기려는 사람들을 수두룩하게 겪어온 원필은 친구들에게도 곁을 잘 안 내줬다. 내 주기가 두려웠다. 상처받기 싫었다. 그래서 원필은 포장지를 덧대고 또 덧댔다. 빈틈 따위는 존재하지 않도록.

 

왠지 도운에게는 빈틈을 보여줘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

 

 

 

 

 

도운이 깁스를 하고 난 뒤부터 원필과 도운은 부쩍 붙어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매일 아침 원필은 새 붕대를 사 와 도운의 깁스를 갈아줬고 도운의 도우미를 자처했다. 급식 판을 대신 받아주고 급식을 같이 먹고, 가방(든 건 딱히 없었지만)을 들어주기도 했다. 도운의 점심시간과 하교 시간은 원필과 함께였다. 학교에서 도운의 자취방까지 오 분 남짓한 거리를 걸으며 원필은 도운에게 이런 저런 얘기를 털어놓았다. 도우나 너랑 같은 반 돼서 진짜 다행인 거 같아. 저도요. 마주 보는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도운이 깁스를 풀면서부터 원필이 도운의 자취방에 들르는 빈도수가 늘었다. 원필의 집보다 학교에서 훨씬 가깝기도 했고 결정적으로 원필은 본인의 집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학교에 복학하게 되면서부터 혼자 살게 되었다고 했는데 도운이 방문해본 원필의 집은 혼자 살기에는 턱없이 넓은 고급형 오피스텔이었다. 와 무슨 혼자 사는 집이 이래 삐까뻔쩍하노. 하는 생각도 잠시 혼자 이 넓은 곳에 있으면 참 외롭겠다고 생각했다. 가족들과 떨어져 산지 일 년 반이 다 되어가는 도운은 가끔 몰려오는 혼자 사는 외로움을 잘 알았기에 자신의 자취방에 자주 오는 원필을 막지 않았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기말고사가 코앞이었다. 원필은 도운의 자취방에서 상을 펴고 앉아 문제집을 풀고 있었고, 원필은 매트리스 위에서 드럼 영상을 보고 있었다. 문제를 풀던 원필의 샤프가 움직임이 뚝 멎었다. 원필은 요새 고민에 잠기는 시간이 길어졌다. 온종일 원필을 쫓는 도운의 눈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또 멍하니 있네. 진짜 뭔 일 있는 거 아이가. 시험이 직전인데도 영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에 도운이 요즘 무슨 일 있냐고 말을 꺼내려던 참이었다.

 

 

 

도운아.”

 

원필이 한발 빨랐다.

 

?”

 

일루 와 봐.”

 

원필이 제 옆자리를 탕탕 치며 말했다. 원필의 말에 도운은 반쯤 눕다시피 했던 몸을 일으켜 원필에게로 내려갔다.

 

형 요즘 뭔 일 있으요?”

 

도운이 원필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이젠 조금 익숙해졌다고 시도 때도 없이 얼굴이 달아오르진 않았다. 어디 아파 보이지는 않는데.

 

아니 뭔 일은 없구. 그냥 고민.”

 

고민이요?”

 

.”

 

먼데요? 제가 해결은 못 해줘도 듣는 건 기가 막히게 잘할 수 있지요.”

 

도운이 가슴을 팡팡 두드리며 믿으라는 듯 말했다. ~ 믿음직한데. 원필은 그런 도운의 가슴팍을 한 대 툭 치곤 도운에게 물었다.

 

 

 

도운아 너는 만약에 드럼을 못 치게 되면 어떨 거 같아?“

 

?“

 

. 너는 드럼으로 진로를 정한 거잖아. 근데 만약에 너가 드럼을 못 하게 됐어. 그럼 어떻게 할 거 같아?“

 

 

 

도운의 얘기로 예시를 들었지만, 원필의 얘기인 걸 도운이 모를 리가 없었다. 더는 피아노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원필. 긴 소매로 팔꿈치 주변에 길게 자리한 흉터를 가리고 다니는 원필. 항시 원필과 붙어 있는 도운인지라 보지 않을 래야 안 볼 수가 없었다. 다만 원필이 직접 이야기를 꺼내기까지 묵묵하게 기다렸을 뿐이었다. 도운의 집에서 편하게 입고 있던 얇은 긴 팔 소매를 걷어 올리며 원필이 말을 이었다.

 

 

 

이거 보이지. 나 왼쪽 팔이 아예 산산조각이 났었어. 오른쪽은 팔은 아니고 손이 다쳤어. 그래서 난 이제 피아노 못 해. 네 살 때부터 피아노를 쳤는데 이젠 피아노를 못 친대. 그래서 죽고 싶었어. 그냥. 내 전부였거든. 내가 피아노를 너무 좋아했거든. 집에서는 그냥 공부 열심히 해서 대학부터 잘 가라고 나중에 하고 싶은 거 생기면 유학을 보내주든지 하겠다고 하는데 난 잘 모르겠어. 내가 이걸 놓고 다른 일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지. 너라면 어떨 거 같아 도운아? 너도 음악 하니깐. 물어보고 싶었어.“

 

 

 

원필이 덤덤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네 살부터 하던 거를 잃었을 때의 상실감. 도운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드럼을 못 치게 되면 어떨 것 같냐는 원필의 물음에조차 잠시 심장이 철렁했다. 자신은 고작 중학교 때 시작했는데도 그랬다. 도운도 자신이 걷는 길에 확신과 애정이 깊었다. 그게 무너지게 된다면? 나는 버틸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하게 됐다. 정적 속에서 말을 고르고 고르다 입을 열었다.

 

 

 

. 저는 진짜 드럼 말고 할 줄 아는 게 없어서요. 드럼을 못 치게 되면 진짜 막막할 거 같아요.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이고, 운동을 잘하는 것도 아니여가꼬. 그냥 지금 당장 답을 낼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할 거 같아요.“

 

그치. 어렵지.“

 

근데, 저는 아마도. 지금 저한테 그런 일이 닥친다면 그래도 뭔가 제가 할 수 있는 게 있잖아요. 드럼을 전문적으로 해서 드러머가 되고 이런 건 못하더라도 그냥 관련된. 뭐 그런 것들에 시선이 갈 거 같아요. 저는 음악 하는 게 너무 좋아가꼬. 할 수 있는 선에서 관련된 걸 찾을 거 같아요. 곡 작업하는 걸 배우거나, 재즈 밴드 드럼 같은 것도 있고. 꼭 힘을 많이 써야 드럼을 칠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할 수 있는 선에서 관련된 걸 찾을 거 같다. 원필은 생각해보지 못한 부분이었다. 당장 답을 낼 수는 없겠다던 도운은 원필에게 해결의 실마리를 줬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뭐가 있을까. 이것저것 생각은 많이 들었는데 가지가 영 뻗어 나가질 않았다.

 

 

 

, 형은 쭉 클래식만 하신 거죠.“

 

? . 준비는 거의 그쪽으로만 했지. 중학교 때는 코드 찾아서 이것저것 쳐보고 하긴 했었는데 잠깐 하다 말았지 뭐.“

 

아 진짜요? 그라믄 형 혹시 작곡 이쪽은 관심 없어요?“

 

작곡?“

 

. 그 저 다니는 학원에서 작곡 수업도 있거든요. 형은 공부도 잘 하니깐 Y대 작곡과 같은 쪽으로 준비해도 괘안치 않을까요. 퍼뜩 생각이 나가. 형은 기본기도 탄탄하니까 금방 잘 할 거 같은데.“

 

. 실용음악 쪽 말하는 거지? 그쪽으로는 진짜 생각을 한번두 못 해봤네.“

 

형만 괜찮으면 저 수업하는데 함 와볼래요구경해도 되고 상담해도 좋고. 아 그 제가 절대 뭐 학원에 친구 데려가야 하고 그래서 그런 게 아이고, 형이랑 작곡과도 되게 잘 어울리는 거 같아서.“

 

그래 그러지 뭐. 재밌겠다. 도운아 고마워 고민 들어줘서. 뭔가 가닥이 좀 잡힌 거 같아.“

 

 

 

원필은 도운의 학원에 구경 차 간 날 상담까지 마치고 등록까지 끝냈다. 며칠 동안 생각의 정리를 마친 덕이었다. 도운아 나 생각해봤는데 너 말대로 Y대 작곡과 준비 해볼라구. 고마워 진짜. 우리 이제 학원에서도 보겠다. 그치. 급식을 먹은 뒤 운동장 스탠드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원필이 말했다. 눈에는 총기를 띈 채였다. 반짝거리는 원필의 눈을 마주한 도운은 왠지 모르게 감격스러웠다. 와 진짜요? 잘됐네요. 뭐가 잘 됐다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도운이 웃으며 말했다. 도운은 참 무해하게 웃었다. 원필은 그 무해한 얼굴은 마주 보며 웃었다.

 

 

 

정말 도운이 자신을 살게 해주고 있었다.

 

 

 

 

 

*

 

 

 

 

 

한 학기가 빠르게 지나가고 여름방학이 시작됐다. 참 살벌하게도 푹푹 찌고 더운 날씨의 연속이었다. 도운은 학교에 있는 시간을 대부분 학원 연습실에서 보냈고, 그렇게 종일 죽치고 있다 보면 원필이 학원에 왔다. 원필은 꼭 수업에 들어가기 전에 도운의 연습실을 찾아 인사를 건네고 수업에 들어갔다. 도우니 안녕. 도우니 오늘도 있네. 도우니 오늘도 일찍 왔네. 원필은 꼭 도운의 이름을 부를 때 도우니, 라고 끝을 늘여 발음했다. 그 늘이는 발음을 내뱉는 입술이 귀여웠고 자각했을 땐 이미 귀가 시뻘겋게 달아오른 뒤였다. 원필은 도우나 오늘두 파이팅! 해맑게 인사를 건네고 팔랑팔랑 본인의 수업을 들으러 갔다. 도운은 뭔가 위험함을 감지했다. 심장께가 근질근질했다.

 

 

 

꿈에 원필이 나왔다. 처음에는 평범했다. 사복을 입었다는 것 정도가 차이점이었고 처음에는 꿈이라는 것조차 자각을 못 했다. 원필과 집에서 피자를 먹고 있었다. 피자를 다 먹고 자연스럽게 뒷정리를 했고, 기름이 묻은 손가락을 쪽 빠는 원필의 입술에 시선이 갔다. 도운의 시선을 느낀 원필은 뭘 봐. 하고 푸스스 웃었다. 양치 먼저 하구. 먼저 하고? 꿈에서까지 도운은 영 눈치가 없었다. 쪼르르 화장실로 향하는 원필을 따라 화장실로 향했고 나란히 서서 양치를 했다. 칫솔 걸이가 두 개 걸려있었다는 걸 보고 도운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긴 했다. 어쨌건 간에 양치하고 사이좋게 입을 헹궈냈다. 거울을 통해 히. 웃은 원필이 이제 됐다. 하고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은 원필 앞에서 도운은 멀뚱히 서 있었다. 무슨 상황인지 분간이 안 됐다. 원필은 도운의 무반응에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눈을 뜬 모양이 세모꼴이었다. 뭔가 불만인 모양이었다. 한껏 부루퉁해진 얼굴로 지가 먼저 쳐다봤으면서. 한다. 도운은 원필의 입술을 몰래 쳐다본 걸 들킨 걸 알곤 당황했다. 아이, 그게 아니고.

 

 

 

.

 

 

 

원필이 도운의 얼굴을 붙잡고는 입을 맞췄다. 도운의 사고가 멈췄다. 원필의 양치 먼저 하자는 의미는 이런 거였나. 도운이 얼 타는 사이 원필은 도운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곤 쪽 소리 내며 입을 뗐다. 맨날 신호는 너가 보내놓구 왜 내가 먼저 하게 해. 불만이 가득 배인 목소리로 말하지만, 눈이 사르르 접히는 모습은 감출 수 없었다. 도운은 그대로 원필의 얼굴을 맞잡고 입술을 부딪쳤다. 저도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애초에 고개를 꺾어 돌진했다. 원필의 입술을 살짝 깨물자 원필이 순순히 입을 벌리며 도운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러고 도운은 꿈에서 깼다.

 

왜 이런 꿈을 꿨지. 꿈이 꿈이었던지라 도운은 한 새벽임에도 다시 잠에 들지 못했다. 도운은 뜬눈으로 해가 뜨는 걸 지켜보며 머리를 굴렸고 내린 결론은 자신이 원필을 좋아한다는 거였다.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그 입술이 좋았고, 원필의 앞에만 서면 유난히 달아올랐던 얼굴. 그리고 계속 신경 쓰이고 보고 싶었던 이유는 다 자신이 원필을 좋아해서였다. 어쩌면 입학식 날 이름도 모르던 김원필이 자신을 톡톡 두드리며 불렀을 때부터 첫눈에 반한 걸지도 몰랐다. 그 이후로 내내 원필만 쫓았다는 걸 도운은 그제서야 자각했다.

 

 

 

그동안 저도 몰랐던 감정이 터져 나왔다는 걸 깨달았다.

 

 

 

꿈을 꾸고 난 이후로 도운은 원필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원필을 상대로 엄한 생각을 하는 제가 불편했다. 자꾸 원필의 입술만 눈에 들어오고 꿈에서 있었던 장면이 머릿속에서 재생이 됐다. 도우나~ 하고 부르는 목소리만 들어도 그랬다.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오늘도 파이팅! 하는 원필의 얼굴을 보니 생각은 배로 복잡해지고 죄책감이 들었다. 차마 원필의 얼굴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개학하면 계속 얼굴을 봐야 할 텐데 이런 상태가 지속되는건 원필에게도 실례라고 생각했고 도운에게도 고역이었다. 월 수 금 다섯 시. 원필의 작곡 수업시간이었다. 도운은 철저하게 그 시간을 피해 학원에 다녔고 급기야는 저녁에 단기 아르바이트를 구하기도 했다. 가만히 누워 있으면 자꾸 엄한 생각만 들었고 이럴 바에는 몸이라도 빡세게 굴리면서 생각할 틈을 없애는 게 나았다.

 

 

 

몸이 피곤하니 생각을 진전시킬 겨를이 없었다. 이대로 두면. 그것도 그거대로 답이 없었지만 그래도 생각을 좀 덜 하게 되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어느덧 개학이 한 주 앞으로 다가왔다.

 

 

 

도운은 여느 때와 같이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이었다. 습한 공기가 온몸을 휘감아 찝찝했다. 얼른 몸을 씻어내고 선풍기 틀고 그냥 눕고 싶었다. 뭉친 어깨를 휙 휙 풀며 빌라 계단을 올랐다. 깜빡. 도운을 인식한 센서가 불을 밝혔고 도운은 놀라서 기절할 뻔했다. 제 집 문 앞에 누가 쭈그려 앉아 있었다. 인기척에 앉아 있던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원필이었다.

 

 

 

“...원필이 형?”

 

 

 

원필과 눈이 마주쳤다. 아니 형이 왜 여기 이 시간에 뭐 얼마나 기다린 거예요 이제 밤에는 바람도 차븐데. 와 여기에 있어요. 도운은 한껏 당황한 채 횡설수설 말을 내뱉었다. 도운의 입이 움직이던 꼴을 가만히 보던 원필이 입을 열었다.

 

너 나 이제 싫어?”

도운을 보자마자 원필은 인사도 않고 무작정 저가 싫냐는 말을 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도운은 상황 파악이 안 돼 되물었다.

 

?”

 

나 싫어졌냐고.”

 

아뇨 제가 우째 형을 싫어합니까.”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는 원필의 모습에 얼굴이 타오르는 거 같아 도운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럴까 봐 필사적으로 도망을 다녔는데 도운의 속도 모른 채 대뜸 집에 찾아와 자신이 싫냐 묻는 원필이 당황스러웠다.

 

 

거짓말하지 마. 너 나 이제 싫잖아.”

 

아니라고 말하는데도 계속 원필은 도운이 자신을 싫어한다고 말했다. 도운도 울컥 억울한 마음이 치밀어 올랐다. 곧 매일 얼굴을 봐야 하는 사이라 빠르게 마음을 정리하려고 했는데. 제 속도 모르는 원필이 원망스러웠지만,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이런 맘을 먹은 제가 제일 죄인이었다. . 한숨을 내쉰 도운은 머리를 쓸어올리고 입을 열었다.

 

아 안 싫어한다고요.”

 

생전 순하게만 굴던 도운이 까칠하게 말을 내뱉었다. 말을 뱉은 도운 본인도 말을 하고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불쾌지수 때문인지 말이 곱게 안 나갔다. 아씨. 도운은 자신의 머리를 막 헝클었다.

 

이거 봐. 너 나 싫어하잖아.”

 

안 싫다니까요!!”

 

그럼 너 나 왜 피해? 왜 피해 다니는데? 왜 말도 없이 학원 시간 바꾸고 아르바이트하고 그러는데?”

 

원필의 말에 도운은 입을 꾹 다물었다.

 

 

 

도우나 오늘 학원 왜 안 왔어? 어디 아퍼?ㅜㅜ

아 저 알바 시작해서 시간 옮겼어요

 

 

 

원필의 문자에 도운은 간단하게나마 답을 했었다. 답장했으니 원필이 그냥 그러려니 할 거라 생각한 건 오산이었다.

 

 

 

이것 봐. 너 대답 못 하지.”

 

“...”

 

왜 그러는데? 뭐가 문젠데.”

 

“...”

 

나한테 뭐 화났어? 아니면 내가 너한테 뭐 잘못했어?”

 

그게 무슨,”

 

나한테 화 난 거 있으면 미안해 내가 뭐 잘못했으면 내가 고칠게. 뭔지만 말해주면 안 돼? 다 사과할게. 그니까 나 피하지 마.”

 

아니 형이 저한테 뭘 잘못했는데요. 뭘 고치는데요.”

 

일방적으로 피한 건 도운 자신이었다. 잘못은 제게 있지 절대 원필에게 있지 않았다.

 

 

 

그럼 왜 나 피해 왜 나 없는 사람 취급해 내가 뭐 잘못했어? 나한테 뭐 실망했어 내가 고칠게 내가 미안해 응 도운아 내가 다 고칠 테니까 나 피하지 마! 나 버리지 마.

원필의 눈은 이미 한참 전부터 그렁그렁했다. 원필은 참았던 말들을 쉴 새 없이 쏟아내며 울음을 터뜨렸다.

 

 

 

도운은 갑자기 와앙 눈물을 터뜨린 원필에 당황하며 주저앉아 원필의 몸을 마주 앉았다. 도운은 원필의 눈물에 한없이 약했다. 좀 전까지의 예민했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고 잔뜩 고장난 도운은 우는 소리를 하며 원필을 달랬다. 아아아아 형 와 와우시는데요 제가 잘못했습니다횽 제가 형을 우째 싫어해요.

 

 

 

그럼 왜 그러는데 너가 나 멋대로 살려놓고 왜 모른 척해 난 너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데 너가 나 살게 해준다며 책임져야지, 왜 내빼 너 진짜 나빠…….”

 

원필이 도운의 허리를 꼭 붙들며 말했다. 도운은 연신 미안하다고 말하며 원필의 등을 토닥이곤 얼굴에 맺힌 눈물을 소매로 꾹꾹 찍어냈다.

 

아이고 형 다 지가 잘못했어요 일단 들어가서 얘기해요 여 밖이고 밤입니다 이제 추버요 형 몸이 너무 차갑습니다. 대체 몇 시간을 이러고 기다린거에요 지가 언제 올 줄 알고 그냥 전화 하지…….

 

“...나 학원 끝나고 계속 기다렸어 너. 전화 안 받을까봐 무서워서.”

 

? 형 수업 7시에 끝난다 아입니까??? 지금 시간이 몇 신데요 다리 안 아프요? 일어날 수 있겠어요?”

 

 

 

우선 들어가자는 도운의 말은 몸을 일으키려던 원필은 일어나는 데 실패하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나 너무 오래 앉아 있었더니 못 일어나겠어. 도운이 원필의 팔 아래로 손을 넣고 원필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 실례, 좀 하께요. 그거 잠깐 닿았다고 도운의 귀는 터질 듯이 붉었다.

 

 

 

도운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원필을 매트리스에 앉히고 원필의 어깨에 담요를 둘렀다. 잠시만 있으라는 말과 함께 부엌으로 들어가더니 금세 따뜻한 보리차를 내와 원필의 손에 쥐여줬다. 그러고 나서는 땅바닥에 원필을 마주 보는 자세로 앉았다. 이렇게 된 이상 피할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운이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원필은 가만히 컵을 손에 쥔 채로 도운을 빤히 쳐다봤다. 보지 않아도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에 목부터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도운을 바라보다 차를 마시다 하던 원필은 킁. 하는 소리를 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근데 할 말은 해야겠으니까.”

 

“..예에.”

 

그럼 너 그동안 왜 나 피한 건데?”

 

아이 그게 피하려고 한 게 아이고.”

 

너 거짓말 하면 다 티 나는 건 알지.”

 

도운은 오늘만큼 솔직한 제 귀가 원망스러운 적도 없었다. 원필의 말을 듣고 나서 자신이 왜 피했는지 이유가 떠오른 뒤로는 귀가 타오를 것 같이 뜨겁게 느껴졌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솔직하게 말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앞서 원필이 말했던 것처럼 자신은 원필에게 거짓말을 못 했다. 질러 보고 기껏해야 뺨이나 한 대 맞고 말겠다는 마음이었다. 어쩌면 자신이 원필에게 필요한 사람일 수도 있으니 원필이 그렇게까지는 안 나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도운은 이상한 곳에서 대담한 구석이 있었다.

 

나 싫어하는 거 아닌데 왜 피했냐구.”

 

아이. 그게.”

 

.”

 

지가. 꿈을 꿨는데요.”

 

 

 

도운은 얼굴에 고개를 푹 파묻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귀는 그 탓에 더 잘 보인다는 것은 모른 채. 그러고는 내질렀다.

 

꿈에서 제가 형한테 그. 하이고, 그 막 몹쓸. 그런 짓을 해가꼬!!!”

 

“.....?”

 

그래가 형을 보면 자꾸 마음도 간지간질 이상하고 꿈 생각이 자꾸 나고 몹쓸 생각이 자꾸 들어서 죄송해가 피해씁니다 지가 이러면 안 되잖아요. 죄송함니다!!!”

 

 

 

도운이 마음을 먹고 소리를 내지른 것 치곤 반응이 지나치게 조용했다. 도운은 일단 원필의 손이 자신에게 안 날아온 것에 일차적인 감사를 했다. 그래도 이어지는 정적이 무섭지 않은 건 아니었던지라 파묻었던 고개를 슬쩍 들어 원필의 눈치를 봤다.

 

.

 

도운과 눈이 마주친 원필이 웃었다.

 

. 왜 웃어요.”

 

도운이 눈썹 끝이 한껏 내려간 채 다시 고개를 파묻었다. 원필의 입에서 나온 말은 도운이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뭐가 안 되는데?”

 

?”

 

뭐가 안 되냐구.”

 

 

 

원필이 바닥에 컵을 내려놓곤 매트리스 아래로 내려갔다. 갑자기 바짝 가까워진 거리에 당황한 도운은 팔로 뒤를 짚은 채 상체를 뒤로 쭉 뺐다. 우리 도우니 진짜 바보네. 중얼거린 원필이 도운과 얼굴을 가까이했다.

 

.

 

이상한 마찰음이 났다.

 

 

 

너가 말한 몹쓸 짓이 이런 거야?”

 

도운은 상황파악이 덜 된 듯 눈을 꿈뻑였다. 이게 지금 무슨,

 

 

 

아님. 이런 거야.”

 

 

 

원필은 눈을 감고 고개를 살짝 틀어 도운의 얼굴을 쥐었다. 도운에게는 원필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 찰나의 순간이 슬로우 모션으로 보였다. 입술이 다시 맞붙었다. 도운은 망부석처럼 굳어 눈도 못 감고 있었다. 도운의 시야에 원필의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보였다. 원필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떨고 있는 거였다. 도운에게는 억겁의 시간으로 느껴진 몇 초간 가만히 입만 대고 있던 원필이 혀를 내어 도운의 아랫입술을 살짝 핥았다. 그 순간 도운이 마주했던 입술을 슬쩍 뗐다. 갑자기 도운이 입술을 뗀 바람에 원필의 머릿속에는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마주한 두 눈에서는 도무지 생각을 읽을 수가 없었다. 이게 아닌가. 나 지금 실수한 건가? 하는 순간 도운이 원필을 힘으로 슬쩍 밀었다. 그 힘에 원필은 자연스럽게 몸을 매트리스에 기댔다. 도운의 얼굴이 다시 다가왔다. 원필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도운은 원필이 자신의 아랫입술을 핥은 순간 이성이 날아가는 게 느껴졌다. 지금 이 상황이 너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이것도 꿈이면 어떡하지. 꿈이라기엔 코앞에 있는 원필의 숨결이 너무 생생했다. 그래서 먼저 다가가 입을 맞췄다. 도운이 원필의 입술을 살짝 깨물자 원필은 입술을 열었다. 도운의 혀가 원필의 입술 사이를 가로질렀다. 혀가 마주 닿는 감각이 소름 돋게 좋았다. 정신없이 원필의 혀를 빨며 입안을 누볐다. 원필은 넘어오는 타액을 꼴딱꼴딱 삼키다가 끝내 숨을 가쁘게 쉬었다. 도운은 쪽. 소리를 내며 입술을 뗐다.

 

“...이런 짓이요.”

 

원필과 도운의 얼굴이 모두 상기된 채였다. 가쁘게 숨을 내쉬는 원필의 모습에 도운은 다시 한번 저 입에 닿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지가, 잘못한 거면. 그리고 형도 그냥 실수한 거면. 지금 말해요.”

 

“......”

 

아니면 저 진짜 맘대로 착각할거에요.”

 

 

 

눈도 제대로 못 쳐다보면서 도운은 제법 진지한 소리를 했다. 저 바보 멍청이 윤도운은 이렇게 보여줘도 제 마음을 몰랐다. 원필은 양손으로 도운의 양 볼을 잡았다. 말랑하게 손에 감기는 피부가 보들보들했다.

 

 

 

바보야?”

 

?”

 

바보냐구. 내가 너한테 먼저 뽀뽀했는데 너가 무슨 착각을 해.”

 

 

 

. 원필이 도운의 입에 짧은 버드키스를 남겼다. 원필의 말을 이해한 도운은 원필의 입술이 떨어진 뒤 원필에게 달려들어 꼭 껴안았다. 으이구 바보 멍멍이 윤도운.

 

 

 

, 제가 진짜, 진짜 너무 좋아해요. 진짜……. 좋아해요.”

 

웅 알어.”

 

원필이 안겨 오는 도운을 마주 안으며 웃었다. 난 너 하나밖에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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