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데|HATE or LOVE
2020. 6. 20.fic
- 널 생각해
김원필은 화가 자주 나는 편이었다. 물론 그런 욱! 하는 성정을 가지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지만, 각설하고 가장 최근에 거슬리는 한 가지를 꼽자면 숨도 쉬지 않고 대답할 테다.
“따라오지 마.”
“어, 그, 나도 수업을...”
웃기고 있네. 이마에 참을 인자를 오늘만 여러 번 새긴 원필의 신경질적으로 바짝 마른 몸이 매섭게 돌아갔다.
“너 진짜 어이없다.”
“...진짠데...”
“나 수업가는 길 아니라 레슨실가는 길인데.”
“아...”
아는 무슨 아. 24년 인생을 통틀어 제일 거슬리는 존재를 만난 원필은 오늘도 거슬리는 존재를 담당하고 있는 윤도운을 떼어내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썽내기로 맘을 먹었다.
“쫌! 꺼지라니까!”
“레슨도 수업이니까...”
물론 그 거슬리는 존재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는 썽이라는 게 문제였지만.
HATE or LOVE
w.데데
살다보면 늘 예상치 못한 일들을 마주하게 된다. 예를 들면 공부에 ㄱ자도 거들떠보지 않던 학생이 갑자기 뜻이 생겨 공부에 미쳐 생각도 못했던 점수로 소위 말하는 명문대에 합격을 한다던가. 또는 한평생 체육을 하던 사람이 예기치 못한 부상으로 인해 정반대의 길을 간다던지 기타등등 어쩌고 저쩌고 블라블라.
솔직히 말이야 쉬운 일이지, 저런 상황의 당사자가 된다면 누구나 세상이 좆같거나 천국이거나 극과 극의 양가감정을 느끼며 각자의 이야기를 그려나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피를 토할 기세로 살기 위해 노력하곤 한다.
그리고 여기, 예상치 못한 인생을 마주해 적응하느라 죽을 맛인 사람이 있으니. 그 이름하야 이름마저도 예민의 극을 달리는 김원필이 되시겠다.
뭐, 위에 나열한 예시들에 비하면 그리 어쩌고 저쩌고 씨부릴만한 인생은 아닐지 몰라도 원필은 종종 스스로가 꽤나 쉽지 않은 인생이라고 평하곤 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보기에는 원만해보이나 사방이 가시덩쿨 혹은 늪뿐이었다고 말이다.
군대까지 다녀온 스물 넷의 김원필은 꽤나 사회성이 좋은 편이었다. 가시덩쿨과도 같았던 일반고에서 예대 진학으로 인해 인성이 나가리가 될 수도 있었으나, 원필은 타고나기로 애교가 많았고 야망이 넘치는 인간이라 되먹지 못한 본인의 인성을 스스로 수습하기 위해 꽤나 노력하고 공을 들이는 편이기도 했다.
더군다나 전문성과 성향을 막론하고 이미 형성되어있는 어떠한 무리 속에 어쩌다보니 어쩔 수 없이 낑겨들게 될 때에는 그 무리에게 진정성을 인정받아야 안정적인 환경을 얻어낼 수 있다는 것을 몸 소 체득하기까지 했으니까.
해서 김원필은 피나는 노력 끝에 예중예고 출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딜 가든 누구를 만나든 친근한 인사를 주고 받을 수 있는 인싸로 거듭났다. 그 뜻인 즉, 무엇이든 상위권에 들어 교수님들의 눈에 들었다는 말과도 같았다. 아주 아주 과 생활에 충실하면서도 학점도 실기도 절대 놓치지 않는,
“이번 수석도 힘들 거 같지 않냐.”
일반고 출신의 자랑스러운 차석 김원필로.
“형은 어떻게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해요?”
수석 소리에 한껏 날카로워진 원필이 야무지게 성진을 째려봤다. 누가 봐도 성격 좋은 김원필은 자신과 똑같이 일반고 출신인 성진에겐 그 좋은 성격을 내다버렸지만 성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가끔은 타인에게 부자연스럽게 올라가는 원필의 입꼬리를 보다 애쓴다며 측은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그럼 뭐라 하냐. 차석을 차석이라 하지 그럼 2등이라고 정정해줄까?”
“아!!! 형!!!”
“임마, 그냥 마음을 편하게 가지라니까 그러네. 수석이라고 해봤자 말이 1등이지 과에선 널 더 좋아하잖아.”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안 그래도 똘망거리는 눈에 독기까지 더해져선 서글서글하니 동그란 성진의 눈매를 있는 힘껏 째려보는 원필의 입술이 앙 다물렸다.
성진의 말엔 딱히 틀린 게 없긴 했다. 과에서 가장 인싸이자 교수들이 눈독 들이는 사람은 원필이었고, 차석이라고 해봤자 예체능은 존나 천재와 그냥 천재의 상위권 다툼인 것을.
사실 원필도 처음 입학 후 예술고 출신도 아닌 자신이 상위권인 것에 만족하려 했더란다. 하지만 수석의 존재를 확인한 후가 문제였다.
‘왜 그렇게 치는...거야?’
처음으로 수석의 얼굴을 확인했던 날, 아주 재수 없게도 순서가 겹친 학내연주에서 확인할 수밖에 없었던 그 날. 리허설 때 얼빠진 얼굴로 한참동안이나 원필의 리허설을 지켜보던 도운의 물음은 원필의 첫 학내연주를 아주 시원하다 못해 화끈하게 말아먹게 만들었다.
성적과는 무관한 연주이자 수업이었으니 망정이지, 성적이라도 반영되는 실기였다면 김원필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윤도운의 손모가지를 분질러버렸을지도 몰랐다. 아니, 전공자의 손을 분지르는 건 좀 너무 하니 아주 쎄게 꼬집은 상태로 비틀어버렸을지도 몰랐다.
물론 김원필의 성격에 왜 그렇게 치는 거냐는 물음에 그럼 너는 얼마나 잘하냐 묻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이유가 뭐냐고? 이유는 간단했다. 무대에 오른 윤도운의 연주를 듣는 순간 단 한마디도 내뱉을 수 없었으니까. 왜냐고 묻는다면 답할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진짜 끝내주게 잘 쳐서.
윤도운의 피아노는 놀라웠다. 뭐 예술이라는 게 그렇지 않나. 아무리 완벽해도 누군가는 감흥따위 하나 없이 아무런 느낌이 없지만 다른 누군가는 인생을 뒤흔들 만큼의 감정을 느끼기도 하는 그런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알다가도 모를 세계 아닌가.
윤도운의 피아노가 김원필에게 딱 그랬다. 저런 미친새끼가 있나 싶을 정도로 취향인 곡 해석과 둔탁하면서도 섬세한 타건감은 원필에게 좌절감과 무력감을 느끼게 만들었고, 피아노를 시작한 이래 쭉 가지고 있었던 ‘남들보다 늦었다는 환경’으로 인한 열등감이 아닌 ‘개개인이 가지고 태어나는 순수음악성’에 대한 열등감을 강렬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스스로에게 환멸이 날 감정이지만 그 감정을 제어할 방법이 전혀 없다는 걸 알고 최대한 거리를 유지하려 했건만 세상사가 자기 맘대로 된다면 그게 어디 세상사겠는가. 윤도운은 그런 김원필의 속도 모르고 껌딱지마냥 착착착 달라붙어댔다.
여튼 지금까지 줄줄 늘어놓은 수석이니 차석이니 어쩌고 저쩌고 블라블라 입을 턴 이유는 입학 후 한 번도 수석의 자리를 놓친 적 없는 윤도운의 연주에 대한 김원필의 열등감이 군대를 제대한 지금까지도 아주 강렬하게 타오르는 불꽃마냥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함이자, 이 지긋지긋한 열등감이 계속되는 동안 열등감 제공의 주인공 윤도운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위한 밑밥임을 구구절절 헛소리로 고백한다.
자, 그럼 이 윤도운은 어떤 사람이냐 물으신다면 아주 간단했다. 이츠 베리베리 심폴! 이라 외칠 수 있을 만큼 윤도운은 단순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김원필과 반대되는 것을 고르면 그것이 곧 윤도운을 뜻하는 단어였다.
자발적 아싸, 어리숙한 말투, 타인과 함께 있는 시간을 못견뎌하기 등등...
물론 모든 것에 예외가 있든 여기에도 예외가 있었는데 교수들이 눈 여겨 보는 것과 음악적 섬세함과 노력만큼은 서로 비슷한 편이었다. 그 덕에 모든 스승들이 그렇듯 될성부른 떡잎이지만 유난히 다른 모습을 한 수석과 차석을 붙여놓지 못해 안달들이었고 그럴수록 원필의 스트레스는 날로 더해갔다.
여기서 원필은 의문이 들었는데 그 의문은 자신과 함께 교수의 눈에 들어버린 도운에 대한 의문이었다. 왜 그렇게 치냐며 시비 아닌 시비를 걸었던 첫만남의 기억이 새하얗게 리셋이라도 된 사람마냥 도운은 원필의 껌딱지를 자처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쟤는 왜 내 껌딱지야? 물음표가 머릿속에서 백만개쯤 둥둥 떠다녔지만 도운에게 물을 생각은 없었다. 사실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 알았다간 더 많은 것들을 알게 될 것 같아서.
***
“원피라”
윤도운이 부르는 김원필의 이름은 늘 끝이 동그랗게 무너졌다. 키는 저만치 큰 주제에 약간 얼빠진 얼굴은 흡사 말티즈같기도 했다. 도대체 한참 큰 성인어른남자에게서 말티즈의 향기가 나는 건지 그것도 의문이긴 했지만 뭐, 그걸 물어본다면 아마 도운은 얼빠진 얼굴로 어벙하게 말티즈라는 단어만 세 번 이상 반복하며 혼자 곱씹느라 대답을 해야 한다는 것 자체를 까먹을 게 분명했다.
“그만 좀 불러.”
“나 오늘 한 번 불렀는데...”
“뻥치지 마라. 아까 연습하면서 구석탱이에서 부른 거 내가 무시했잖아. 기억 안나?”
“...아...”
매번 피해다니고 구박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군대마저 비슷하게 다녀와서 복학한 학기마저 같은 도운을 완전히 밀어내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과도 같았다. 남들이 보기엔 성격 좋은 원필이 아싸인 도운을 어쩔 수 없이 받아주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실상 성격은 윤도운이 더 좋은 쪽에 속했다.
“이번에도 니가 수석할거지.”
“그, 그건 교수님들이...”
“웃기고 있네. 내가 너 때문에 3년 내내 차석이야.”
“미안...”
“봐, 또또 나 나쁜새끼 만들지.”
“아냐! 원피라 너 피아노 좋은데...”
단 둘만 있는 앙상블 연습실에서 각자 피아노를 한 대씩 붙들고 입씨름 아닌 입씨름을 하길 수차례. 쩔쩔매는 도운이 곧 울기 직전의 얼굴이 될 무렵 즈음 원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땜에 피아노를 못 치겠어.”
“왜애! 어, 나 나갈까? 다른, 연습실루 갈게...”
그 말 한마디 했다고 안절부절 못하는 도운의 모습에 원필이 한 숨을 푹 내쉬었다. 한번쯤은 꼭 이겨보고 싶은데. 이번에도 안될 것 같아 기분이 싱숭생숭해지는 참이었다.
생각하기 싫어도 자꾸만 헛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윤도운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곡을 해석하고 저렇게 표현하지. 부분연습을 하다가도, 전체연습을 하다가도, 양손 따로 연습을 하다가도 멈칫멈칫. 도무지 진도라는게 나가지 않았다. 손가락이 착실하게 움직이면 뭐하나, 곡해석은 단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야, 윤도운.”
“어?”
“실기 준비 다 했어?”
“어, 어...”
“그럼 한 번 쳐줘.”
“어?”
“쳐달라고. 궁금하니까 쳐줘.”
“...”
군대를 제한 3년. 3년이라는 시간동안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부탁 아닌 부탁이었다.
실기시험 때나 실기실의 닫힌 문 새로 나오는 희미한 연주소리나 방음이 썩 좋지 못한 연습실 벽 너머로 띄엄띄엄 들려오는 연습소리는 들었을지언정 제대로 된 연주는 한 학기에 딱 한번 차례가 돌아오는 학내연주에서나 들을 수 있는 윤도운의 피아노 연주는 늘 모순된 양가감정을 느끼도록 했다.
시작 전 긴장감을 서리게 만드는 그 짙은 숨소리, 무릎 위로 다소곳하게 올라가 있던 두 주먹에 힘이 풀리며 부드럽게 건반 위로 도약하는 그 순간.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원필은 3년 내내 손에 꼽히는, 몇 안 되는 그 순간을 손꼽아 기다렸다. 열등감과 자존심은 차마 그 쳐달라는 말을 내뱉지 못해 그 날만을 기다리면 숨을 죽였다.
“...여기서?”
“응.”
그랜드피아노가 자리한 레슨실도 아닌 조율이 그리 잘되어있지 않는 업라이트 피아노 두 대만 덩그라니 있는 앙상블실에서 마주한 둘이 정적 속에서 시선을 마주했다. 별거 아닌 부탁이, 부탁 같지도 않은 말투임에도 그 속엔 수많은 감정들이 잔류해 넘실넘실 울렁거렸다.
한참이나 원필을 바라보던 도운은 말없이 몸을 틀어 숨을 짧게 들이마신 뒤 오래된 건반 위로 양 손을 올렸다. 도운의 손가락이 건반 위를 유영하는 내내 원필의 호흡 역시 불규칙하게, 그러나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한 채 흘러갔다.
순수함과 다를 바 없는 이 열등감은 어디에서부터 기인한 걸까. 너는 무슨 생각을 하며 이 곡을 연주하는 걸까. 날고 긴다는 천재들이 수두룩빽빽인데 왜 나는 네 곡만 들으면 지독한 모순을 겪을까.
음표 하나하나가 지나갈 때마다 속수무책으로 흘러내리는 동경이, 열등감이, 황홀함이, 창피함이 이리저리 텀벙텀벙 저 밑바닥으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너는,”
곡이 끝나는 순간, 윤도운의 손끝이 건반 위를 떠나는 순간.
“무슨 생각을 해?”
속삭이듯 흘러나온 원필의 물음에 도운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너.”
“......”
“...늘, 항상.”
“.....”
흥건하게 젖은 감정의 밑바닥에 발바닥이 붉게 물들어갔다.
“널 생각해.”
곧 발끝이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